클럽 정크
최대환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최대환의 중편 연작소설 <클럽 정크>는 각각 독립된 세 편의 중편 소설이 서로 교차하고 간섭한다. 소설 속에는 총 세 명의 '그'가 등장하는데 '그'가 보고 만나고 관계 맺는 인물들이 다른 작품에서 각자의 스토리를 갖고 등장한다.

 

첫 번째 <화면 속으로의 짧은 여행>의 주인공 '그'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으로 어쩌다 보니 비틀즈 만을 듣게 되었고 성적으로는 한정적 불능이다. <공각기동대>, <아키라>, <에반게리온> 등 만화 속 세계가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현실적이다. 따라서 그는 <에반게리온>의 레이에게는 불능이 아니지만 현실 속의 '긴 머리 여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불능이다. 클럽 정크에서 술을 마신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단발 머리 여자를 만나는데 '그'는 그녀를 레이라 부르며 함께 지낸다. 그녀가 떠나게 되자 '그'는 자신이 화면 속으로 짧은 여행을 했다고 느낀다.

 

두 번째 <그의 삶의 1920년대>의 주인공 '그'는 고등학교 과학 선생이며 동성애자이다. '그'가 사랑한 남자는 이미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그를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SadMouse라는 아이디를 갖고 있는 그는 자신의 방에 출구 없는 미로를 설치하고 그 안에 로봇 쥐를 풀어 놓았다. 쥐는 출구를 찾을 수 없어 매번 미로 속을 헤매일 뿐이었고, '그'는 어쩌면 쥐가 미로를 벗어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쌍둥이처럼 차려입은 두 명의 가출 소녀를 만난 '그'는 그녀들이 동성애자이고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함께 지내기로 한다. 도시를 떠나기 전 BeAlone이라는 아이디를 갖고 있는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낯선 도시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법>이라는 책을 번역하고 있었고, SadMouse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자는 것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SadMouse는 번역한 초안을 '그'에게 건낸다. 낯선 도시로 떠나기 전 '그'는 BeAlone에게 작별인사를 보낸다.

 

세 번째 <그의 꽃, 그녀의 꿈, 마술 같은>의 '그'는 마술사이다. 사랑하던 그녀가 권태를 이기지 못해 떠나간지 1년째 되던 날, '그'는 클럽 정크에 가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난다. 여자와 술을 마신 후 '그'는 여자에게 꽃을 만들어 건낸다. 얼마 후 여자가 '그'를 찾아와 꽃의 수명이 다했다며 새로운 꽃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사고로 죽은 애인이 꿈에 나타나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의 꽃이 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떠나갔던 그녀에게서 전화를 받은 '그'는 자신이 이제 이 도시에서 붙박여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김동원의 해설이 무척 흥미롭다. 흔히들 아날로그의 세계를 인간미 넘치는 세계로, 디지털의 세계를 비정하고 냉혹한 세계로 인식하는데 김동원은 디지털의 세계에서야 말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를 하나 된 전체로 인식했던 아날로그 기술에 맞서 똑같은 세계를 부분들의 집합체로 보기 시작하면서 하나 된 전체로서의 아날로그 세계를 분할하고 해체해버렸던 디지털 기술의 힘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현대 문명의 주된 조류로 정착해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인식 한계라는 바탕 위에서 그 자유를 누린다.

 

흥미롭고, 공감가는 견해다. 특히 사진에 수록된 흑백 사진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까만 점인데 단지 그 크기만을 크거나 작게 하여 회색을 비롯한 농암을 표현한다는 예시는 탁월한 비유였다.

 

<그의 꽃, 그녀의 꿈, 마술 같은> 中 권태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아서 적어 본다.

 

실상 권태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못 견딜 만큼 벗어나고 싶지만 완전히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 도시에 대해 느끼는 권태 또한 따지고 보면 이 도시에서의 자기 모습, 자기 삶에 대해 느끼고 있는 것......다른 도시로 옮겨간다고 해도 곧 그곳에 권태를 느끼게 될 것.

 

거듭 느끼는 것이지만 사물에 대한 인식의 밑바닥에는 언제가 자기애라는 침전물이 고여있는 것 같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727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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