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서 빠져나온 여자
원재길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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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삼촌의 좌절과 영광

 

꽤 이름난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가 일하던 삼촌은 철도청 고위 간부의 눈에 띄여 그 집의 집사로 스카웃 되어 들어간다. 어느 날 그 집 사모님이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며 삼촌에게 별 생각 없이 꿈풀이를 청했는데 삼촌의 해몽대로 일이 흘러가 목숨을 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삼촌은 관상은 물론이고 수상, 족상까지 두루 보며 용한 점쟁이 노릇을 한다. 자연 고관대작들의 면담 요청이 끊이지 않았고, 맞선 자리도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맞선 자리에 나온 여자 대신 그 여자의 어머니에게 반해 일시 부적절한 삶을 살기도 하나 제 궤도로 돌아온 뒤로는 한동안 잠잠하게, 고위층들의 운세나 점쳐 주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철도청 고위 간부의 어린 딸과 눈이 맞아 사랑의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발각이 되어 생이별을 경험한다. 딸은 자살하고, 삼촌은 남미로 훌쩍 떠나간다.

고국에 방문한 삼촌이 식사를 하던 도중 레스토랑 웨이터에게 패악을 떠는 노부인을 보더니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칠레에서 오신 유명한 예언가라는 말에 노부인은 삼촌 앞에 와서 미래를 알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삼촌은 노부인의 남편이 몇 살인지부터 시작해서 소소한 일들을 맞춰나가더니 급기야 그 노부인의 딸이 자살한 사건까지 덤으로 알아 맞추고, 조만간 호되게 나가 떨어질 것이라 예언한다. 아니나 다를까 노부인은 출구를 향해 허둥지둥 달려가다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o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

 

한 사나이가 벼락을 맞은 후 없던 능력이 생겨났는데, 벽을 마음대로 통과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사내는 자신의 능력을 신기해하며 여자 목욕탕을 드나들다가 이것이 시들해지자 부자들이 사는 집을 돌아다녔고, 음악회나 미술 전람회를 공짜로 구경하기도 하였다. 전국을 구경 다닌 이후에 사내는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탄 후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호텔이건 레스토랑이건 공짜로 이용했다.  

사내가 어느 날 해장국이 간절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가 우연히 한 여자가 <벽에서 빠져나온 여자>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사내는 여자에게 자신이 몇 년동안 너무나 고독했다면서 책을 쓴 작가와 대화하면 뭔가 통할 것 같다면서 저자가 어디 사는지 아느냐 물었고, 여자는 자신이 책의 저자라고 밝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여자는 초능력에 시한이 있다고 말한다. 듣느니 처음인 얘기에 반신반의하는 사내에게 여자는 자신이 언젠가 세종문화회관에 갔다가 벽에 반쯤 끼인 사내를 보았는데 그 사내가 벽을 통과하던 중 능력이 사라져버려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자신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 능력을 쓰지 않고 봉인해왔는데 최근에 벽에 부딪힌 경험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사내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벽을 향해 걸어갔고 두 번 다시 바깥 세상으로 돌아나오지 않았다.

 

원재길의 소설집에 수록된 아홉 편의 이야기는 대부분 기묘한 이야기들이다. <삼촌의 좌절과 영광> 같은 경우 '삼촌의 예지 능력이 기실 사람들이 바라는 바에 기대어 적절히 짜맞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는 식으로 설명하려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이야기들이 모두 현실에서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가령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작가들이 별안간 폭로전과 싸구려 자기고백에 빠져든다든가(신종 바이러스에 관한 보고서), 손이 주인을 배반하여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든가(손), 먼지에 알레르기 반응을 심하게 일으키는 여인이 먼지에 쌓여 죽어간다든가(먼지의 집) 하는 식이다. 또한 주체 박약이라는 신경증을 앓고 있는 화자가 은행원과 여급의 이중생활을 완벽히 수행하는 여인을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되는 블랙 코미디인 <싸락눈>,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자취 없이 사라진 '솜다리' 여인에 관한 이야기 <별>, 어머니 대신 여선생에게서 모성을 느낀 이후로 여성의 원형을 찾아 한평생을 헤메이는 <새벽 편지>가 실려 있다.

 

작품집 중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마음을 끄는 작품은 <물 속의 집>이다. 

남편이 벌인 모종의 사건이 범법으로 판가름나자 여자와 아이는 둘이서 텐트촌을 떠돌게 된다. 어느 날 여자가 잠결에 칭얼대는 아이의 입을 막아 조용히 시켰는데, 다음 날 깨어보니 아이가 죽어 있었다. 여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집을 떠올리고 그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집은 여자가 마을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몰되어 지금은 없다. 여자는 허탈한 상태에서 허청대며 길 옆 풀숲에 있다가 낚시꾼 두 명에게 윤간을 당한다. 여자는 트렁크를 들고 물 속에 있는 할머니의 집으로 걸어들어간다. 잠시 후 물 속에 잠긴 트렁크에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할머니가 여자와 아이를 반기고, 여자는 평온했던 과거 할머니 집에서 맞던 물가의 아침 나절을 떠올린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물 속의 집>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비정하게 여인의 동선을 추적한다. 낚시꾼들이 버린 피라미들이 땅바닥에서 썩어가는 모습은 여자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표징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유일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할머니집 이지만 그곳은 이미 수몰된지 오래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그녀가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떠올린 평온한 광경은 환상일 뿐이다. 

작품은 어찌 보면 끔찍하다. 우리가 떠나온 그곳은 이미 수몰되었고, 우리가 한 행동이란 범법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내 손으로 죽이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기껏해야 윤간의 대상이 될 뿐이며,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며 환상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 뿐이라면, 지금 이곳이 지옥이 아닌가.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669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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