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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17세의 레오는 오리나무 공원과 넵툰 수영장에서 '랑데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레오는 동성애자라는 '목덜미에 두른 불편한
침묵'을 벗어 던지고 가족으로부터 떠날 수 있다면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레오가 수용소로 끌려갈 때 할머니는
'너는 돌아올 거야'라고 말한다.
수용소에서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질병에의 노출 등은 사람들을 생존 이외의 것에 대해 무신경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동료가 죽으면 슬픔을
느끼기 보다는 옷가지를 벗겨내는 데 골몰했다. 강제노동수용소 사람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굶주림이었다. 굶주림은 '배고픈 천사'의 모습으로 모든
이들에게 깃들어 있었다. 주식인 양배추수프는 '몸에서 살을, 머리에서 이성'을 앗아갈 정도로 형편 없는 것이었고, 음식물 쓰레기 더미를 뒤져
감자 껍질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다.
굶주림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을 없앤다. 그들은 뼈와 살만 남아서 성적인 정체성이 제거된 동류가 된다. 때때로 물물교환을 위해 석탄을 들고
나선다. 석탄은 흔전만전이었다. 어느 날 레오는 구걸을 하다가 러시아 노파에게서 한 번도 쓰지 않은 깨끗한 하얀 수건을 선물 받는다.
물물교환에서 먹을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지만 흰 손수건을 간직하는 행위를 통해 고향에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만성적인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벼룩에게 피를 빨리면서도 그들은 언제 자신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러시아인들은
'곧'이라는 애매한 말만 했으므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이 계속 일 하도록 사육당하기만 할 뿐 집에는 돌아갈 수 없는게 아닐까
불안해한다.
5년째 접어들자 러시아인들이 임금을 지급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위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 돈으로 기름진 음식을 사먹었다. 그러자
뼈에 살이 붙기 시작했고, '남자'와 '여자'로 변모하여 상대편 성에게 잘보이고자 했다. 눈(目)의 허기가 온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레오에게 편지가 온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는 어린 아이의 사진이 붙어 있고 출생 연도가 쓰여 있을 뿐 아무런 설명도,
안부인사도 없었다. 부모님은 레오에게 몇 년만에 보낸 편지에 스무살 넘게 차이 나는 동생의 출생을 알렸을 뿐이었다. 레오는 대체물이
생겼으니 이제 자신은 필요 없다는 얘기라 생각했고 고통을 느낀다.
갑자기 레오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러시아인들은 아무런 얘고도 없이 갑자기 그들을 풀어주었다. 수용소에서 체득한 두려움들 역시 레오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기에 레오의 가족은 레오를 불편해했고 레오 역시 가족들을 불편해한다. 수용소에서 알게 된 그들은 서로를 아는 척하지 않았고,
오직 고생 없이 수용소 생활을 한 이발사만이 편지를 보내온다.
레오는 자신이 '풀려난 몸으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고 자기를 기만하는 증인이 되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난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읽다 보면 쥘 르나르의 <홍당무>가 생각난다. <홍당무>처럼 소소한 일들에 대한 소소한 단상들이 이어진다.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니 극적인 사건 같은 것이 전개될 법도 하건만, 그런 이야기는 거의 없다.
레오는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를 유지한다. 문제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들이 모두 수용소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특수한 의미를
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의미를 표현할 말이 적당치 않을 때에는 작가가 만든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한다. 숨그네(Atem+Schaukel)
역시 그러한 단어다.
1944년 여름 소련 적군이 루마니아를 점령한 후 파시스트 독재자 안토네스쿠를 처형한다. 루마니아는 소련에 항복했고, 소련은 나치에 의해
파괴된 국가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한다. 루마니아에 살던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간다.
독일인이 소련 강제수용소에서 노역을 했다는 것은 소련이 1917년 혁명 기간에 견지했던 세계주의를 폐기 처분하고 스탈린의 국가사회주의 틀
안에서 민족이라는 허구의 개념을 통치 수단으로 휘두르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독일 민중과 러시아 민중은 2차 세계대전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기본적으로 2차 세계대전은 자본의 팽창 때문에 발생한 자본가들의 힘겨루기였지 민족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의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는
패전국 민족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러한 견해에 쌍심지를 켜고 반박을 하는 사람들과 굳이 토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도 나는
애매한 개념이라고 생각할 뿐더러 국가라는 것도 레짐을 비롯한 여러 층위에서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이 연일 독도와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며 민족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사람들은 '일본놈들' 운운 하며 적개심을 드러낸다. 사실
아베와 일본 자본가들은 독도와 위안부, 센카쿠 등 극우적이고 자극적인 문제를 화두로 삼지 않으면 자국 민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버블 시대처럼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자민당으로 대표되는 일본 자본가들은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의 극우적인 발언과 입장 표명에 대해 중국과 한국 정부가 겉으로는 반발하고 있지만 사실 손해날 것은 없는 장사이다. 독도,
센카쿠열도, 위안부, 신사참배 그런 자극적인 단어들만으로도 골치 아픈 여러 문제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마련이고 얼마든지 민족적인 감정을
자극하여 분열을 야기할 소지가 있는 민감한 문제들을 뭉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나라 정상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에서 어떤 얼굴 표정을 지을
것이냐가 고민이지 고스톱 판을 엎을 생각은 전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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