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도둑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o 수국꽃 정사(情死)

 

사진학교를 졸업한 후 대형 출판사 사진부에서 이십 년 남짓 일해온 기타무라는 버블이 무너지자 정리해고를 당한다. 가족들에게는 프리랜서 카메라맨으로 나설 것이라 큰소리를 쳤지만, 불가능한 얘기라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디지털 장비를 사서 심기일전해 보려 했지만 오래된 수동식 카메라에 익숙한 몸은 잘 따라주질 않았고, 잔뜩 남은 장기주택불입금과 불투명한 미래가 기타무라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기타무라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경마장을 찾아 도쿄 근교로 떠난다. 경마에서 탈탈 털리고 온천장 여관을 찾은 기타무라는 온천 지역이 자신의 처지처럼 전락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칸센이 생기자 사람들은 여관에서 묵어갈 바에야 집으로 돌아가버렸고, 떠나야할 때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 남아 쇠락해가는 여관과 술집을 지키고 있었다.

술집을 찾은 기타무라는 그곳에서 스트립걸을 만난다. 손님은 기타무라 한 명 뿐이었다. 스트립쇼는 쇼걸이 옷을 다 벗은 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쇼걸과 관계를 갖는다는 식의 프로그램으로 진행 되었다. 하지만 기타무라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고, 여자 역시 기타무라의 마음을 눈치 챈다. 둘은 따로이 술을 마시러 간다.

 

여자의 이름은 릴리였다. 릴리는 기타무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왠지 기타무라의 분위기가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것 같았다. 릴리는 자신이 어릴 때 유부남을 만나 사랑에 빠진 일, 아이를 낳은 일, 그리고 아이를 빼앗기고 쇼걸로 돌아와 밥벌이를 하다가 손님으로 온 자신의 아이를 만난 기구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 놓는다. 그리고 기타무라에게 자신과 함께 죽어달라고 부탁하고, 기타무라는 자연스럽게 좋다는 대답을 건낸다. 장기불입금에는 생명보험이 딸려 있었다.

정사를 위해 둘은 여관에 들고 그곳에서 술을 마신다. 릴리는 기타무라가 찍어준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며 자신이 그처럼 예쁘게 나온 사진은 처음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관 종업원이 둘이 든 방 문을 노크한다. 릴리가 일하는 술집 주인이 목을 메달았다고 했다.

릴리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기타무라와 나눠 가진 후 닷짱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떠난다. 택시를 잡아탄 기타무라는 젊었을 적 그랬듯 양손의 검지와 엄지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앞 유리를 향해 구도를 잡아본다.

 

o 나락(奈落)

 

12월 어느 날, 신주쿠 동양물산 본사 38층 엘리베이터에서 총무부 가타기리 타다오가 추락해 사망한다. 엘리베이터 문은 열렸지만 실제 승강기는 도착하지 않았는데 기타기리 타다오는 그것을 모르고 발을 내딛은 모양이었다.

가타기리는 처음 입사할 적에는 총망받는 사원이었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총무부에 들어간 이후 사원들 경조사나 챙기며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과장 대리에 머물고 만다. 입사 동료 둘은 그동안 임원으로 차근히 승진해 사장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타기리가 죽고 난 후 그의 죽음에 모두들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 가타기리와 다툰 직원, 그의 청을 매정하게 거절한 동료 등 그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타기리의 죽음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모두들 애써 자위하며 남에게 책임을 미루는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그 와중에 회사 전체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발언까지 나오고, 동양물산 회장은 가타기리가 회사를 망하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여 주도면밀한 계획을 짠 후 자살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마저 든다.

 

o 죽음 비용

 

"만약 죽는 순간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자네는 얼마를 내겠나?"

 

오우치 소지는 친구 고야나기를 명부에 보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야나기가 내뱉었던 말을 생각해 낸다. 오우치 소지는 그 말이 못내 가슴에 고여 신경이 쓰였는데, 얼마 후 고야나기의 아내가 오우치 소지를 찾아와 고인의 통장에서 사망 직전 1억엔이 인출되었다는 말을 전한다. 오우치 소지는 그 돈이 틀림 없이 죽음 비용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비서를 시켜 알아보게 한다.

라이프서비스라는 이름의 회사는 곧 사람을 보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소개한다. 고통없이 즉사하는 방법, 편안하게 잠이 든 뒤에 죽는 방법, 인간의 오감이 전부 완전한 행복감을 맛보면서 나름한 봄날의 햇살을 받는 천천히 생을 마감하는 방법 세 가지가 있으며 각각의 방법에 따른 비용이 다르다고 했다. 오우치 소지는 자신도 죽음과 멀지 않은 처지였기 때문에 사기에 불과하다는 비서의 말보다 라이프서비스 사원의 말에 관심이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늦게 얻은 후처의 부정, 둘째 아들이 비서를 농락한 일 등 오우치 소지가 원치 않았던 일들이 일어난다. 특히 비서 미야코는 오랫동안 자신을 보필해 오고 있었으며 나이와 격식을 버렸다면 부부의 연을 맺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오우치 소지는 라이프서비스를 기억해 낸다. 하지만 그 회사는 사기업체로 판명되어 경찰 수사가 시작된 뒤였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채 죽어가던 오우치 소지는 비서 미야코가 자신을 안아주자 라이프서비스가 제시한 마지막 죽음의 길이 지금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o 히나마츠리

 

도쿄올림픽을 앞 둔 2월, 야요이는 오히나사마는 2월에 꼭 바람을 쐬어줘야 시집을 갈 수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히나마츠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술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야요이 혼자서 저녁을 차려 먹고 쓸쓸히 잠드는 일이 많았다.

그때 요시이 아저씨가 야요이의 집을 찾는다. 요시이 아저씨는 엄마보다 열 살이 어렸는데 예전에 옆집에 살던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엄마에게 구애를 했지만 엄마는 나이차가 너무 많다며 거절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하게 된 후로는 가끔 요시이 아저씨가 야요이를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갔다. 때로는 함께 목욕탕에 가기도 했다.

그날도 함께 목욕탕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전파사 앞을 지나게 되었다. 요시이 아저씨는 텔레비전을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야요이는 요시이 아저씨 같은 아빠를 달라고 부탁한다. 삼짓날이 지나버렸고 오히나사마는 2월 바람을 쐬지 못했지만, 야요이는 하느님도 하룻밤 정도는 대충 눈감아 주시겠지 하고 생각한다.

 

o 장미도둑

 

메이프린세스호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아버지에게 '나'는 영어로 편지를 쓴다. 자주 쓰지는 못하지만 기항하는 곳에서 받으실 수 있도록 애를 쓴다.

선생님이 바뀐 일, 옆집 헬렌 패트릭과 좋아 지내는 일, 애써 가꾼 장미가 도둑 맡는 일 들을 쓰는 동안 '나'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린 아이의 시각으로 해석하는데, 그 와중에 엄마의 불륜 사실이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o 가인(佳人)

 

어머니의 취미는 어머니가 사시는 시골 동네 처녀들을 중매하는 일이었다. 신이치는 자신의 부하 직원 요시오카 히데키를 떠올린다. 훤칠한 키에 운동도 잘했고 업무 능력도 뛰어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서른 여덟이 되도록 애인이 없었다. 신이치는 그에게 동성애자인지, 혹은 성불능자인지 묻는다. 신이치는 단호히 아니라는 답변을 한다. 흡족해진 신이치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키는데, 어머니를 본 신이치가 당황하더니 잠시 후 어머니와 드라이브하고 식사를 하겠따며 모시고 나간다. 롤리타 컴플렉스의 반대인 연상(年上) 컴플렉스를 떠올린 신이치와 아내는 어지러운 마음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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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꽃 정사>가 가장 마음에 든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퇴락해 가는 사람과 지역을 배경으로 정사(情死)를 결심하고 여관에 들어 술을 마시는 두 사람. 담담하게 그려지는 그 모습에서 절제된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 외의 작품은 딱히 마음이 가지 않는다.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이기에는 일관성이 부족해 보이는데 국내에서 따로이 선집으로 만든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417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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