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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세울 것이라곤 공기가 맑다는 것 뿐인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강간당한 후 살해당한다. 함께 놀던 네 명의 아이들은 살해당한 에미리가 낯선 남자를 따라갔었다고 진술하는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낯선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에미리가 죽기 전 마을에서 프랑스 인형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인형을 훔쳐간 사람과 에미리를 죽인 사람이 같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추측일 뿐,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사람들은 사건을 잊어간다.
3년이 지나고 에미리의 어머니가 당시 함께 놀았던 네 명의 여자아이를 불러 '너희들이야 말로 살인자이다. 범인을 붙잡아 내든지 속죄를 하든지 하라'는 가혹한 말을 남기고 도쿄로 돌아간다. 시간은 흘러 이제 살인범의 공소시효가 며칠 안 남은 지금 당시 사건을 겪었던 네 명의 아이들의 삶이 흉측하게 드러난다.
여린 성격의 사에는 에미리가 강간당한 것은 그 아이만이 생리를 시작하여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생리를 겪지 않는다면 범인으로부터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에를 좋아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사에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결함이 있다고 밝히지만 남자는 그런 사에라도 좋다면서 프러포즈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남자가 사실은 사에와 한 마을에 살았고, 프랑스 인형을 훔친 범인임이 드러난다. 남자는 사에에게 프랑스 인형의 옷을 입혀가며 도착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그것이 불화가 되어 사고가 일어난다. 사에는 남편을 살해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자수한다.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의식하던 마키는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어느 날 학교에 정신병자가 난입하여 칼부림을 하는데 마키는 그에게 용감히 맞선다. 격투 중 범인이 자신의 칼에 스스로 상처를 입고 풀장에 빠진다. 기어오르려는 그를 발로 찬 마키는 황색언론에 의해 도리어 살인범으로 몰리고 자신의 입장과 정당성을 항변하는 발언마저 인터넷에 게시된다.
곰같은 외모 때문에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아키코는 언제나 자신을 돌봐주던 오빠가 애딸린 여자와 결혼을 하려 하자 오빠편이 되어 준다. 새로 생긴 조카는 귀여웠고 오빠 가정은 행복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오빠 집에 찾아간 아키코는 오빠가 조카에게 성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을 보고 에미리를 떠올리며 오빠를 죽이고 만다. 오빠와 결혼한 여자는 단지 새로운 결혼을 통해 비극적인 삶을 바꿔보고 싶었을 뿐 오빠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몸을 허락한 적도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야쿠자의 꼬임에 빠져 신세를 망쳤고, 그런 야쿠자의 딸 따위는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는 여자였다.
천식 때문에 부모사랑을 언니가 독차지하자 언제나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던 유카는 급기야 형부를 유혹하여 아이를 갖는다. 유카는 에미리 어머니가 남긴 가혹한 말에 반발하며 범인을 찾으려 했고 어느 정도 단서도 얻는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에 겁을 먹은 형부가 유카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자 자신도 모르게 계단에서 밀친다. 유카의 형부는 사망한다.
에미리의 어머니는 딸과 함께 놀던 아이들이 범인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함은 물론이고 기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오해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혹한 말을 남긴다. 하지만 아이들의 삶은 살인 사건 이후 180도 달라져서 결국 모두가 살인자가 되고 만다.
얼핏 작위적이고 도식적인 상황을 설정한 후 작가는 독자에게 묻는다. 아이들의 삶이 피폐하게 변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이들이 살인자가 된 데에는 저마다 다른 스토리가 있지만 그 촉매제는 에미리 어머니의 가혹한 한 마디 때문이었다. 정작 발언의 당사자는 그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기어 다니고, 걷기 시작하고, 학교에 다니고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하고 그런 단순한 과정을 큰 탈 없이 이어가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경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