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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
박일문 지음 / 민음사 / 1998년 5월
평점 :
품절
운수(雲水)는 종교시간에 법사님으로부터 <시인 이탁오의 생애>라는 책과 출가하게 된 경위를 듣는다. 법사님은 어느 날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이 강렬한 햇살을 받아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허정과 적멸의 세계를 보았고, 그 길로 출가했다고 들려준다. 부모님을 잃은 후 의지하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운수는 영주 부석사를 찾아가 출가의 뜻을 밝힌다.
학능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운수는 과격하고 파격적인 무애스님과 더불어 행동하다가 삼천배를 올리는 벌을 자주 받게 된다. 운수는 삼천배를 하면서 몸이 힘든 순간이 지난 후에는 어느 순간 힘듬을 잊게 되고,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여 궁구하고,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경험 한다.
우란분절 법회에서 조실스님이 '<선(禪)의 자유>가 대채 무엇인가' 라는 화두들 던진다. 스님은 베트남의 광둑스님 이야기를 하며 삶과 죽음을 하나로 쓰는 용무생사(用無生死)야 말로 진정한 자유, 진정한 선의 자유, 진정한 인간의 자기해탈이며 유정 무정 인간해방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다.
얼마 후 적묵스님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소신공양을 한다. 적묵스님의 곁에는 선묘여인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했다. 선묘여인은 세속적인 사랑을 바랐지만 적묵스님은 자신이 움켜진 화두와 선에 몰두하여 묵언, 면벽, 단식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편 무애스님은 스승인 조실스님을 찾아가 스승이 보시바라밀을 한 적이 있었는가 묻는다. 조실스님은 말이 없었고 무애스님은 스승의 귀를 취모검으로 베어낸다. 운수는 얼마 후 계를 받는다. 법명은 이름인 운수(雲水) 그대로를 쓴다.
운수는 승적을 유지한 채 대학생이 되고, 70년대 말과 80년의 혼란스런 시대 상황을 살게 된다. 운수는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공부한다.
조실스님이 무애스님을 찾는다. 무애스님은 조실스님에게 왜 자신의 칼을 피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조실스님은 그 칼을 피했더라면 무애스님이 설익은 지식을 갖고 세상으로 뛰쳐나가 식광(識狂)이 되었을 것이며, 그 칼을 받음으로 인해 당신 스스로도 반성을 했으니 둘 모두를 살린 것이라 담담히 말한다.
무애스님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피력하는 바, 그것은 세상으로 나가 대승적인 불교를 실천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실스님이 자신의 의발을 무애스님에게 물려주고자 하나 무애스님은 그것마저 거절한다.
선묘여인이 끝내 자살하고, 사구재를 지내기 직전 운수와 무애가 함께 길을 걷는다. 무애는 운수에게 출가 전의 일을 묻는다.
적묵스님의 출가 전 속명이 운수라는 것, 선묘여인이 무애의 동생이라는 것, 운수와 그들의 고향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의 법칙 속에 있는 것이다.
<적멸>은 구도소설이자 불교계의 자기모순을 고발한 소설이며, 작가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는 소설이다. 초반부의 불교적 구도(求道) 부분과 중반 이후의 대승적 불교에 대한 의견이 성긴 느낌이나, 이만한 수준의 불교적 구도(求道)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는 고은 정도가 아닐까 한다. 박일문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십오년에 걸쳐 출세간과 출출세간을 거듭한 전력이 있는 작가로 불교와 그 세속적 실천에 대해 고민했던 작가이다.
<달은 도둑놈이다>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도서관에 틀어 박혀 고시공부하듯 글을 썼던' 그는 표절 시비작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후 몇몇 스타일리쉬한 작품을 남긴다. 하지만 지금은 문단에서 사라졌다.
장정일과의 표절 논쟁이 고발 운운으로 지저분하게 끝난 후, 역시 자신이 남긴 글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로 법정 구속되어 이름을 더럽힌 끝에 이제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적멸>에서 하이데거의 나치 옹호 행위와 관련해 '결국에는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가지고 판단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삶의 내용으로 판단해야 한다'라는 말빚을 남겼으니, 문단에 돌아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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