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ㅣ 펭귄클래식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o 가정의 행복
'나'는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후 시골 영지에서 가정교사인 카탸, 그리고 여동생 소냐와 함께 조용히 지낸다. 아버지의 친구인 세르게이 미하일리치가 후견인이 되어 집안일을 돌보아주기 시작한다. '나'는 나이 차가 있는 그에게 점차 호의적인 감정을 품게 되는데, 그 역시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점차 세르게이 미하일리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하면 그와의 동질감을 강하게 느낀다. 하지만 세르게이 미하일리치는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솔직한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야외로 나들이를 간 날 세르게이 미하일리치가 우회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자 '나'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주위에 공표한다.
결혼식 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시시하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곧 그런 느낌이 사라지고 행복으로 충만한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점차 '나'의 감정이 예민해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 남편이 바깥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에 관해 나와 이야기하기 저어하던 일이 발단이 되어 둘 사이가 잠시 삐걱거린다. 남편은 '나'의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도시로 이사 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
페테르부르크 생활을 시작하기 전 남편은 도시 생활을 즐기되 사교계를 경계해야 하고 부활절 주간에는 시골로 돌아가 지내자는 말을 한다. '나' 역시 그런 남편의 말에 동의하지만, 막상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고 선망의 대상이 되자 그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다. M 대공이 자신과 만나길 고대하고 있다는 공작부인의 말에 '나'는 남편과 시골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으면서도 주저하는 태도를 보인다. 공작부인이 남편에게 '질투' 운운하자 남편은 냉담한 태도로 화를 내고, '나'는 야회에서 누릴 기쁨을 '희생'하여 시골로 가겠다고 말한다. '희생'이라는 말이 남편을 더욱 자극하여 둘 사이는 냉랭해지고 '나'는 오기에 차서 반드시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말을 하고 만다. 그날 이후 둘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실랑이와 말다툼은 피했지만 예전과 같은 애정어린 말들도 없어졌다. 그해 여름 온천지에서 '나'는 정렬적으로 구애하는 이탈리아 후작에게 잠깐이지만 욕정을 느껴 키스를 허용하고 만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는 그날 밤 기차를 타고 남편이 체류중인 하이델베르크로 향한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 생각이었지만 남편은 울먹이는 '나'를 보고 모든 것을 짐작했다는 듯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시골로 돌아가자는 말에도 그는 한없이 냉정한 태도로 그곳에서 견뎌내지 못하리란 것을 잘 안다고 말한다.
시골로 돌아온 둘은 아무런 정렬도 없이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낸다. 비가 내리는 날 예전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나'에게 남편이 다가와 온화한 태도로 말을 건낸다. 감정에 북받힌 '나'는 과거에 남편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책망한다. 남편은 별다른 동요 없이 과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하며 예전과 같은 불안과 동요가 더는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자고 말한다. 마침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오자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남편과 '나'의 로맨스는 끝이 났고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전혀 다른 행복한 삶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교계를 둘러싼 '나'와 남편의 갈등을 묘사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나'의 욕망은 물론 사교계에서 각광받으며 한껏 즐기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라는 <권력자>에 의해 자신의 욕망이 억압되길 기대하면서도 정작 우회적인 억압에는 도전한다. '나'는 끝내 남편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혹은 외면하고) 둘 사이는 틀어지고 만다.
남편이 소극적이고 우회적인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자신이 아내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 위축되어 있다. 남편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제는 아내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시기가 왔고, 예전 사교계에 빠져 있을 당시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이제 남녀의 행복이 아니라 가정의 행복이 찾아왔다는 것인데 이것이 진정 '행복'인지, 아니면 '주어지고 감내해야 할 상황'인지는 의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성(性)과 관련된 욕구'가 아닐까 싶다. 나이 많은 남편은 아내를 성적인 쾌락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축된 상태이고, 젊은 아내는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성적 방종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남편은 아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하는 상태이고, 아내는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남편이 '남편으로서의 권력'을 발휘해 제어해주길 원한다. '남편으로서의 권력'이란 곧 남성성을 보인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가부장적인 권력, 혹은 인습적인 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성 독자는 작가 톨스토이의 여성에 대한 불신감이 반영된 소설이라고 느낄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데 여성 독자가 이 글을 읽었을 때의 감상은 사뭇 다를 수 있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여성이 삶을 스스로 제어하고자 할 때에 남성이 성적으로 주도적일 것이라는 편견에 근거한 성적 권력, 혹은 가부장적 권력은 반발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화자인 '나'의 행동은 일견 이해될 성질의 것이다. 게다가 남편은 화자의 구체적인 행실을 근거로 하여 질투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부정적인 예견을 근거로 질투를 하고 있다. 그것은 남편의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런 감상도 나오지 않을 이유는 없다.
o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른 봄날 '나'는 기차 여행 중 포즈드니셰프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주변사람들이 사랑과 결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더니 공격적인 태도로 질문을 던지다가 문득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와 단둘이 객실에 남게 되자 그는 자신이 아내를 살해한 사람이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려움 없는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결혼 전 방탕한 생활을 일 삼았고 몸을 파는 여자들과 관계하기도 했다. 어느 날 매우 날씬한 몸매의 여인에게 반한 그는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허니문은 생각각과는 전혀 달랐고 그녀와 관계를 갖고 난 후 둘 사이는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이유를 성적 접촉 자체에서 찾는다. 남자와 여자가 정신적인 동반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성관계에 있으며 서로에 대한 욕정으로 일시적인 합의에 이르러 쾌락을 얻을 수는 있지만, 괘락을 얻은 이후에는 곧바로 서로를 성적 대상으로 여겼다는 생각, 즉 동물적인 상태가 되었다는 생각에 불쾌감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악화되던 관계는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서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하지만 아내가 젖을 먹여선 안된다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수유를 중지하게 된다. 그는 아내가 '성스러운 어머니'이면서도 '육체적인 욕구를 가진 여성'이라는 기묘한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내와의 관계가 악화 일로를 치닫던 중 트루하쳅스키라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교우하게 된다. 포즈드니셰프는 그와 아내가 모종의 불륜관계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그와 아내의 연주회를 계획한다. 연주회 전 포즈드니셰프는 아내의 태도가 평상시와 달라진 점에 광포하게 화를 내지만 아내는 그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자극하여 연주회는 예정대로 열린다. 그들은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비롯해 몇 가지 소품을 연주한다.
연주회가 끝난 후 포즈드니셰프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서 그는 문득 아내와 트루하쳅스키의 태도가 불륜관계의 그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집으로 돌아온다. 새벽 1시에 집에 도착한 그는 아내와 트루하쳅스키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평온함마저 느낀다. 그가 느꼈던 두려움은 영원히 질투심에 사로잡혀 내면의 분노를 폭발시킬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단검을 집어든 그는 아내를 찌르고 트루하쳅스키는 도망친다. 자살할 생각이었던 그는 아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살의 욕구가 사그라든다. 아내는 죽어가며 포즈드니셰프를 저주할 뿐이었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는다. 관 속에 누운 그녀를 보며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마친 그는 몸을 떨며 흐느끼더니 용서하십시오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톨스토이 자신이 겪었던 가정 불화와 그로 인한 고통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다. 성욕에 관한 셰이커교도적인 관점은 차치하고, 그가 그려내는 포즈드니셰프의 질투, 그리고 그로 인한 번민과 고통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려내는 지옥과 필적할 만하다. 포즈드니셰프가 아내의 불륜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본 후 느꼈던 안도감은 그런 점에서 이해가 간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아내의 불륜 사실보다 질투심에 사로 잡혀 영혼이 잠식당하는 상태였을 것이다. 분노의 외적 표출로 아내를 살해하고, 내적 표출로 자살을 하겠다는 포즈드니셰프의 결심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위대한 점은 포즈드니셰프가 트루하쳅스키를 쫓아가 살해하지 않는다는 점과 자살을 포기한다는 점이다. 포즈드니셰프는 양말 바람으로 트루하쳅스키를 쫓아가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그는 자신이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둘에게 비춰지는 것에 이미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외형적인 마무리에 신경을 쓰는 살인자의 모습을 스스로 연기한다. 이성복의 <그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는 시에서 '제가 부는 풍선 속으로 들어가려는' 상태이다. 연기가 모두 끝난 후 관객이 없는 상태에서 자살을 한다는 것은 맥빠지는 일이다. 관객이 없는 상태에서는 연기도 헛헛할 뿐이다.
o 악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예브게니 이르테네프는 영지를 관리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할 일은 산재해 있었지만 이르테네프에게는 이 일들을 충분히 꾸려낼 육체적, 정신적인 힘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괴로운 점은 성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는 곧 산림지기 다닐라에게 적당한 여성을 주선해주길 부탁한다. 다닐라는 남편이 도시에 나가 있는 스테파니다라는 여성을 소개해 주고 이르테네프는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한 번으로 끝내려 했던 처음의 마음과는 달리 관계는 꽤 오래 지속된다. 이르테네프는 마침내 관계를 청산하고 일년 뒤 리자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결혼한다.
평온한 시기가 얼마간 지속되는가 싶더니 스테파니다의 모습이 자꾸만 이르테네프의 눈에 들어온다. 이르테네프는 필사적으로 스테파니다의 기억을 떨쳐버리려 하지만 불쑥 불쑥 치솟는 욕망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이르테네프는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욕정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사람들은 이르테네프가 자살한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진정한 정신병자는 타인에게서 광기의 징후를 보면서, 자기 자신에게서는 똑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한 번 빠져들었던 육체적 쾌락이 이르테네프를 자살에 이르게 만든다. 이르테네프는 리자를 정신적으로 사랑했으면서도 또 다른 사랑, 즉 육체적인 사랑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욕구야말로 인간을 고뇌하게 만든다.
o 신부 세르게이
1940년, 중기병대의 화실 기병대장으로서 장차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시종무관이 될 것으로 기대되던 화려한 경력의 미남 공작이 결혼을 한 달 앞두고, 황녀를 보필하며 총애를 받던 아름다운 약혼녀와 파혼하고 퇴역을 신청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누이에게 넘겨주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린다.
그의 이름은 스테판 카사츠키로 어린 시절부터 모든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왔다. 군인이 된 후에도 그의 능력은 두드러져 황제의 신임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더욱 출세하기 위해 사교계에 드나들었고 뛰어난 집안의 딸과 결혼해 신분을 상승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백작의 영양 코로트코바와 약혼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혼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그녀가 사실은 자신이 황제의 정부였음을 고백한다. 스테판은 그 고백에 충격을 받아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간다.
세르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스테판은 수도원에서 여러 해를 지내면서 세속의 욕망에서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고뇌는 깊어져갔고 자신이 교만에 빠졌음을 깨닫고 탐비노 수도원의 암자에 은거한다.
어느 날 마코프키나라는 이혼녀가 세르게이를 유혹하기 위해 그의 수도원을 찾는다. 세르게이는 마태복음에서 신체의 일부를 훼손시키더라도 욕망에 굴복하지 않는 사례를 떠올리며 자신의 손가락을 도끼로 자른다. 마코프키나는 세르게이가 보여준 금욕적인 모습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껴 수녀가 된다.
세르게이의 명성은 점차 높아져갔고 그가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세르게이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그는 자신이 대중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명성에 취해 과거의 신실한 마음이 점차 고갈되어 감을 느낀다. 어느 날 상인이 자신의 딸을 치료해달라며 세르게이에게 부탁한다. 찾아온 상인의 딸은 육감적이었고 세르게이는 그녀의 유혹에 굴복하고 만다.
자살 하려는 마음을 먹은 세르게이에게 문득 어렸을 적에 알고 지내던 파셴카를 떠오른다. 파셴카가 아이들에게 놀림받던 기억을 떠올리던 세르게이는 그녀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다시 만난 파셴카는 삶이 주는 온갖 번잡함에 눌려 지내고 있었지만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세르게이는 자신은 지금껏 하나님을 핑계삼아 인간을 위해 살았지만, 파셴카는 사람들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하느님을 위해 산다고 느낀다. 다시 길을 떠난 세르게이는 부랑아로 오인되어 시베리아로 쫓겨나 그곳에서 노동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환자를 돌보며 지낸다.
출세를 위해 접근했다가 진정한 사랑을 느꼈으나 정작 상대편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황제의 정부였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세르게이는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면서도 내심 세속적인 부와 권력, 명예욕을 버림으로서 그런 것들에 집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세르게이는 육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육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했다고 느꼈을 때에는 명예욕에 사로잡힌다. 하나의 욕망에 굴복하자 극복했다고 믿었던 육욕에도 굴복하고 만다. 세르게이는 파셴카로부터 새로운 구원의 희망을 보게 되지만, 파셴카의 어떤 면이 그러했는지는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83337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