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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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인 '나'는 한 작가의 문학과 삶을 집중 조명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는 <작가탐구>의 편집자에게 원고 빚을 진 적이 있는데, 편집자가 은근히 당시의 빚을 상기시킨 탓에 소설가 박부길 씨에 관한 원고를 떠맡게 된다. 작업을 위해 박부길 씨를 찾아간 '나'는 그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꺼려하는 탓에 발표된 소설과 인터뷰 기사에 의존하여 행적을 쫓아간다. 그리고 미발표 소설을 통해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그의 소설을 통해 과거 행적을 추적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그것이 소설이라는 데 있었다. 소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가려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는 선택과 여과 역시 그 주체는 작가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어렸을 적 큰아버지 집에 살던 '나'는 뒤안의 감나무에 가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받는다. 하지만 금기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으로 '나'는 뒤안으로 몰래 숨어들곤 했다. 그곳에는 골방이 하나 있었고, 골방에는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남자가 묶여 있었다. 그는 정신이 이상한 듯 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그가 수재 소리를 들으며 고등 고시에 합격할 것으로 믿어졌던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금기는 감나무가 아니라 감나무가 있는 뒤안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 남자의 부탁으로 손톱깎이를 가져다 주는데 남자는 손톱깎이를 이용해 자살하고 만다.

얼마 후 어머니가 종적을 감추고 '나'는 큰아버지 집에서 살게 된다. 큰아버지는 끝내 뒤안에 갖혀있던 남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고, 어머니의 행적에 대해서도 입을 다문다. '나'는 두 번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르고 가출한다.

가출 후 중국집 배달부를 전전하다가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표면상 아버지의 정신이 그리된 데 대한 시댁의 질책에 못 이겨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어머니의 장래에 대한 시댁의 배려가 있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나'를 서울의 중학에 입학시키고 자취를 시킨다.

자취방은 어두컴컴하고 눅눅했지만 '나'는 그곳의 어둠에 차츰 순응된다. 바깥 세상은 '다른 이들의 세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 속에 처하기를 꺼려하였으며 헌책방에서 책들을 빌어다 읽을 뿐 다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였고 자신과 동류의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통금을 피해 뛰어 들어간 교회에서 종단을 만난다. '나'는 종단이 원하는 남성이 되기 위해서 신학대학교를 지원하고,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투영으로서 그녀를 바라보았던 탓에 사랑의 형태는 집착적이고 편집증적인 그것으로 변질된다. 결국 그녀는 '나'를 참지 못하고 떠나고, 나는 신학교를 자퇴한 후 과거의 어두컴컴한 자취방으로 돌아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의 구성이 독특하다. 소설가가 또 다른 소설가의 문학과 삶을 추적하는 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작가 이승우가 3년에 걸쳐 집필하였고, 자전적인 소설임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액자 속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다른 점이라면 어머니를 취하는 대신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종단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박부길의 아버지는 자신이 건내준 손톱깎이로 자살을 한다. 박부길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는 곧 재가하므로 박부길은 모성의 심각한 결핍을 경험한다. 이러한 결핍 때문에 박부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종단에게 쉽게 끌리게 된다. 박부길은 그 사랑을 '숭배'라고 지칭하지만 집착적이고 편집증적인 그 형태는 사실 '자기만을 바라보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 사랑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이외에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소설은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변형이다.

 

천안에서 세제 개편과 관련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집어든 책이다. 책은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고, 다른 책 밑에 집어 넣으면 표가 안날 크기이다. 학교 다닐 때 내내 수업 중 다른 책을 읽었다. 그 책이 읽고 싶었다기 보다는, 수업과 무관한 짓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때에는 아예 수업을 빼먹고 읽었다. 직장을 다니는 지금은 교육 시간에 몰래 책을 읽는다. 교육 내용을 숙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어짜피 나누어준 자료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을 듣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런데도 교육 시간에 책을 읽는다. 어쩔 수 없이 굳어진 버릇이다.

며칠 간 <김남주 평전>을 조금씩 읽고 있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읽게 된 <생의 이면>은 그리 와닿지 않는다. '정치는 똥이고 똥에 꼬이는 쇠파리가 되고 싶지 않다'며 시대에 침묵한 것을 변명하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김남주는 시 <학살>에서 말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양심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전선이다 무덤이다 감옥이다

도대체 형제의 살해 앞에서 저항하지 않고

누가 자유일 수 있단 말인가

 

이승우는 같은 시기에 똥에 꼬이는 쇠파리 운운을 하며 떠나간 여인에 목이 메어 정신 분석에 골몰하고 있다. <생의 이면>은 결코 가벼운 소설은 아니며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도 엿보인다. 작가의 역량 또한 가볍지 않다. 그러나 전적으로 소설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82288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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