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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여가수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평점 :
외젠 이오네스코는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자로 1909년 루마니아의 슬라티나에서 태어나 1911년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한 후 정착하여 1994년 삶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
옮긴이 오세곤에 따르면 이오네스코는 거의 40대에 이르러서야 극작가로 나서는데 그 동기가 무척 엉뚱했다고 한다. 영어 공부를 위해 영어책을 읽다 거기서 지고의 진리들을 발견하였고, 감격한 나머지 그것을 널리 알리고자 메모해 놓고 보니 전혀 생명이 없는 죽은 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에 초기 삼부작인 <대머리 여가수(1950년 초연)>, <수업(1951년 초연)>, <의자(1952년 초연)>을 차례로 발표하는데, 여기서 다룬 것은 인간 언어의 부조리함이었다. 즉 인간은 자신들의 언어를 지극히 합리적이라 믿으며 문화의 축적과 의사소통의 도구로 삼지만, 실제로 그것은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해서 인간의 언어생활은 원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오해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에서 다룬 주제와 일면 맥을 같이하고 있다. 실제 희곡을 읽다보면 일면 알 수 없는 말들의 나열에 불과해 보일 때도 있다.
<대머리 여가수>는 시계 종소리와 시간이 전혀 맞지 않는 것을 시작으로 부부 사이의 대화가 얼빠진 자들의 그것처럼 빗나가기 일쑤이고 소방대장이 풀어놓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중언부언 하거나 전혀 재미있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말장난이 이어지더니 문득 막이 내리는 식이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이어감으로서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을 보여준다.
<수업>에서는 박사가 되기 위해 교수를 찾아온 학생 사이에 수업이 이루어지는데 이들의 수업은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양상을 띤다. 초보적인 덧셈과 뺄셈에서 끙끙대다가 철학적인 의미로 발전하려 하는가 하면 언어학에서는 같은 말을 나열하면서 다른 언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하녀는 언어학이야 말로 재앙의 지름길이라며 교수에게 충고하지만 교수는 성적 정렬을 암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수업을 계속 진행한다. 학생은 언어학 수업이 계속될수록 고통을 호소하고 교수는 알 수 없는 정렬에 휩싸인 끝에 학생을 식칼로 살해하고 만다.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 결국 살인으로 귀결되고 만다.
<의자> 역시 난해하기 짝이 없다. 90세가 넘은 노인과 노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들을 계속 맞이한다. 노인은 자신의 사상을 대변해 줄 변사를 기다린다. 마침내 황제마저 노인을 방문하자 노인은 감격한다. 하지만 노인과 노파는 별안간 자살하고 그토록 기다리던 변사는 벙어리처럼 웅얼대다가 칠판에 백묵으로 글씨를 쓰는데 그나마도 '안녕'이라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책은 각주로 넘쳐나고, 그 각주의 대부분은 원작을 어떻게 한국어로 바꿀 것인지 고민한 번역자 오세곤의 흔적이다. 오세곤은 최대한 충실한 번역을 위해 영문 번역판과도 비교하며 적절한 한국어 번역에 골몰하나, 실제 이 연극이 한국에서 상영될 때 프랑스어 원작의 미묘함을 관객에게 적절히 전달할 수 있을지는 매우 의문이다. 언어의 부조리함을 전달하기 위해 상당부분 의역이 불가할 것이다.
현실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현실의 이면을 좀 더 잘 인식할 수 있도록하는 것이 부조리극의 목적이라고 했을 때 작가의 역량을 판가름짓는 것은 독자, 혹은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정도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조리를 보여주고 관객의 반응은 각자에게 맡기는 것은 일류 작가가 아니다. 부조리극이지만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부조리극 작가가 골몰해야만 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조리극 작가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결국 독자, 혹은 관객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과 난해함의 바다에 빠져 산소가 부족한 듯한 상황에 내팽겨쳐진 후 스스로의 이해력 부족을 탄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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