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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주의자
네이딘 고디머 지음 / 한웅출판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소설은 메링의 농장에서 흑인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농장에서 일하는 누구도 시체의 신원을 알지 못했고 경찰은 조사 없이 시체를 발견된 곳에 묻고 떠나버린다. 메링은 독일계 백인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선철로 부유해진 인물이다. 그는 이미 도시에 돈벌이를 위한 모든 수단을 갖고 있지만 농장을 사들였다. 농장의 손해는 세금에서 공제될 것이고 안식처로 기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링에게는 이혼한 아내와 아들이 하나 있고, 공산주의자인 애인이 있었다. 그리고 돈 많은 부자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메링은 그들 중 누구와도 진정한 의사소통은 하지 못한다.
아들과는 대화가 거의 없었고 배낭에서 발견된 책은 그 아이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들은 메링이 자신을 군대에 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을 뿐이고 메링은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 애인은 자신이 메링이라면 농장을 있는 그대로 둘 것이며 그가 흑인 노동력을 착취해 농장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점을 종종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내세우는 신념과는 달리 백만장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고, 도자기 수집이라는 일종의 호사 취미도 가지고 있으며 경찰의 추적이 좁혀져오자 일류 변호사를 고용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만 부조리한 인물이다.
메링은 <롤리타>의 <험버트 험버트>처럼 어린 여자애에게 빠져든다. 자신의 15년지기의 딸이자 아들의 친구인 소녀에게, 그리고 비행기 속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소녀에게 메링은 성적 환상을 품는다. 소설의 말미에 다시 한 번 소녀로 보이는 여자를 차에 태운다. 그러나 그녀는 소녀가 아니었고 이십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녀의 인도에 따라 차를 몰아 간 곳에서 메링은 일단의 부랑아들에게 둘러싸인다. 메링은 자신이 태운 여자, 그리고 부랑아들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메링이 농장에서의 안식을 포기하고 백인들의 나라로 떠나버리고 농장의 흑인 일꾼들은 폭우로 흙에서 떠오른 시체를 정식으로 장례를 치뤄주며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시체가 자신들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끊임없이 메링의 환상과 혼잣말, 과거의 기억이 이어지면서 변주된다. 작가는 그나 그녀로만 지칭되는 인물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든다. 일상적인 대화 사이에도 메링의 환상은 이어진다. 작가는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줄거리를 기대하는 독법은 즉시 수정되어야 하고 그 후로 지루한 메링의 환상과 기억을 읽어내려가야 한다.
농장의 시체는 결국 흑인들의 손으로 안식을 취하게 된다. 메링은 흑인의 시체를 경찰을 시켜 농장에서 치워내려 했지만 실패한다. 보호주의자(The Conservationist)가 메링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는 자신이 보호할 수 없는 것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메링은 원래 흑인의 것(농장과 땅)을 종이에 서명을 함으로서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했고, 거기에서 안식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예정대로 실패한 메링은 결국 백인들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만다.
대학 1학년 때 사서 100페이지 정도 읽다가 지루함에 못 이겨 포기했던 책이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꺼내 읽는다. 때때로 어떤 책은 특정한 나이에는 절대로 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1994년도의 내가 이 책을 지루함을 참고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면 잘못된 일이다. 스무살에는 지루함을 참고 하루를 까먹으며 무언가를 읽는 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마침 독감으로 3일의 원치 않는 휴가를 얻은 나는 <보호주의자>를 읽기에 적당한 상태였다. 책도 인연이 닿아야 읽히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80216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