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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입술 ㅣ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0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책세상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알프레도 르 페라의 격정적인 탱고 가사에 뒤이어 코로넬 바예호스에서 출판된 월간지 <우리 이웃>의 1947년 4월호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에는 후안 카를로스 에체파레가 투병 생활 끝에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쓰여 있다.
네네는 카를로스 에체파레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네네는 후안 카를로스의 죽음을 <우리 이웃>을 통해 알게 되었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은 후안 카를로스 뿐이었다는 사실을 편지에 적는다. 그리고 후안 카를로스의 누이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셀리나와의 불편했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시간은 과거로 흘러간다.
1930년대 중반 코로넬 바예호스에 살던 네네는 후안 카를로스에게 반한다. 후안 카를로스는 네네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한편 부자집 딸인 마벨에게도 마찬가지 말을 건낸다. 그러면서도 과부와는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후안 카를로스의 누이 셀리나는 네네, 그리고 부자집 딸인 마벨과 친구 사이였는데 내심 자신의 동생이 마벨과 연결되어 사교계로 진출하길 원한다. 셀리나는 자신이 미인대회에서 탈락한 것을 트집잡아 네네와 결별한다.
네네는 의사와 관계한 전력이 있었고 셀리나도 몸을 함부로 놀렸다. 둘은 서로의 잘못을 비난한다. 후안 카를로스가 폐결핵에 걸리자 마벨은 그를 멀리하고 경매사와 결혼하기로 한다. 하지만 경매사와 마벨의 아버지 사이에 소송이 일어나 불안한 상황에 처한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의 친구인 벽돌공 판초 역시 후안 카를로스처럼 피부가 하얀 네네를 욕망하고 마벨과도 관계를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녀인 히프를 유혹하여 임신을 시킨다. 히프가 아이를 낳을 즈음 판초는 경찰 후보생이 되어 교육을 받으러 떠나고, 경찰이 된 후에는 히프를 외면한 채 마벨과 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이런 관계를 눈치챈 히프가 판초를 칼로 찔러 죽이고 추문에 휩싸일 것을 우려한 마벨은 판초가 히프를 겁탈하려다가 살해당했다고 거짓 진술을 한다.
네네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고 마벨 역시 평범한 남자와 결혼한다. 셀리나는 외판원들과 놀아나는 여자라는 소문만 돌 뿐 시집을 가지 못한다. 셀리나와 어머니는 후안 카를로스를 치료할 돈이 부족해지자 과부에게 후안 카를로스를 떠맡긴다. 후안 카를로스는 결국 죽는다.
그의 죽음을 접한 네네는 과거의 격정적인 사랑을 떠올리고 후안 카를로스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어머니의 답장을 받은 네네는 한층 대담하게 과거의 격정을 편지에 풀어 놓는다. 하지만 실제 편지를 받고 답장을 한 것은 셀리나였고, 셀리나는 네네의 편지에 적힌 현재 생활과 남편에 대한 불만에 밑줄을 그어 남편에게 투서를 보낸다. 남편은 분개하고 네네는 남편 곁을 떠나 코로넬 바예호스로 떠난다.
네네는 오십이 넘어서 사망한다. 기존의 유언은 자신과 후안 카를로스가 주고 받은 편지를 시신과 함께 묻어달라는 것이었으나 죽기 직전 편지를 태워달라고 수정한다. 남편인 마사가 불 속에 넣은 편지를 집어 넣는다. 타기 직전 잠깐 동안 글씨들이 환하게 떠올랐고, 후안 카를로스의 다정했던 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조그만 입술>은 잡지의 뉴스, 편지, 3인칭 서술 장면, 비망록, 상대편의 대답이 생략된 대화, 감정이 배제된 사건의 나열, 의식의 흐름 등 갖가지 수법들이 동원되어 등장 인물들 각각의 시각이 제시된다. 소설은 종장에 이르기까지 독자에게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조각조각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추악한 욕망과 배신이 설핏 엿보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편지가 타기 직전, 이미 죽어버린 후안 카를로스가 보냈던 편지의 다정했던 말들이 환하게 밝아올 때, 나는 격정적이고 열정적이었던 그들의 한 때를 생각했다. 단지 그들은 헐리우드 영화나 잡지, 열정적인 탱고의 가사들이 보여준 환상적인 삶과 자신들의 실제의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무대가 된 코로넬 바예호스(Coronel Ballejos)는 상상속의 지명으로 작가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헤네랄 비예가스(General Villegas)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곳이다. 작가의 첫 작품인 <리타 헤이워스의 배반(1968)>과 <조그만 입술(1969)>의 무대가 된다.
1973년에는 3번째 소설이자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의 원작으로 알려진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건(1973)>을 출판한다. 하지만 페론과 군사정부에 의해 판금되자 오랜 망명길에 오른다. 첫 망명지인 멕시코에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거미 여인의 키스(1976)>을 출판한다. 그 후 <천사의 음부>, <보답 받은 사랑의 피(1982)>, <열대의 밤이 질 때(1988)> 등을 집필한다. 1990년 7월 22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대학 시절에 우연히 <거미여인의 키스>를 영화로 접하는 행운을 얻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강렬한 인상이 사라지지 않았었다. <거미여인의 키스>가 번역되었을 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릴라 발렌틴에게 동성애자 몰리나가 매일 밤 자신이 보았던 영화를 조금씩 각색해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진 나는 소설이란 본래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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