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구) 문지 스펙트럼
윤후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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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명의 <여우사냥>을 읽다 중도에 흐지부지 된 것은 반은 게으름 때문이고 반은 잘 읽히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얼마 전에 읽은 <제리>의 작가 후기에서 김혜나가 '윤후명 선생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쓴 것을 보고, 때로는 감사의 표시가 감사받을 사람을 도리어 욕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귤>은 이주일 전에 집어든 책이니 다 읽는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읽으면서 윤후명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소재와 이야기가 짜맞춰졌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소설집의 작중 인물들은 대게 현실에서 실패를 경험한 상태에서 특정 사물의 기억과 사건이 겹치며 내적 성찰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 사건들이 대게 개연성 없이 끼어들기 때문에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작위적인 혹은 우연한 사건과 소재의 결합, 그리고 그에 따른 상념은 소설 전체를 무척이나 '소설적'이게 만든다.

<귤>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와 헤어진 후 어렸을 적 그토록 갖고 싶었으나 결국 가질 수 없었던 귤에 관한 기억이 사건과 오버랩되는데 그 과정에서 생전 처음 만난 여자와 관계를 맺게 되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는 국화 재배에 실패한 후 주인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을의 무용학과 여대생과 관계를 맺은 후 헤어진다. <새의 肖像>에서도 민박집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관계를 맺고,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에서도 절집 딸과 아무런 개연성 없이 키스를 한다. 그의 소설에서 여자는 단지 사건의 촉매제일 뿐이다. 여자로부터 촉발된 사건은 소재와 연결되어 관념적인 '소설적 결말'을 만들어 나가는 식이다.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다.


o 귤(원문 <부활하는 새> 中, 문학과지성사, 1985)

 

삼년 쯤 전,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애까지 뱄던 여자와의 이별이 겹치면서 화자 '나'는 암울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술집 작부에게 오랬동안 찾아 헤메었다는 희떠운 수작을 부리자 작부는 자신이 지금까지 거쳐온 지역을 대며 과거를 더듬는다. 너무나 진지한 작부의 태도에 장난이었음을 말할 기회를 놓쳐버린 '나'는 결국 작부에게 한바탕 욕을 얻어먹고 쫓겨난다.

쫓겨난 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나'는 40대 과부의 집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내'가 귤 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극구 한 개를 권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50년대 초반 전쟁중이던 때에 강릉의 바닷가에서 귤을 기다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과는 달리 무척 귀한 귤이 미군 함정에서 바닷가까지 떠내려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토록 먹길 갈망했지만 '나'의 차지까지는 오지 못했다. 당시 '나'는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나'는 소녀를 원했고, 소녀는 귤을 달라고 했었다. '나'에게는 귤나무가 있었다.

과부의 집에서 깨어난 아침 과부의 아들이 불쑥 찾아와 '나'는 무척 민망한 처지가 된다. 아들은 이십대로 섹소폰을 불고 싶어했고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그냥 말하고 싶었다며 섹소폰은 훔친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나에게 가끔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의 어머니와 하룻밤 상관한 죄로 불편한 만남을 지속한다.

그가 마침내 군대에 가서 '나'는 그와의 불편한 만남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대한 그가 전화를 걸어온다.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과 귤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귤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의 어머니가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o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원문 <부활하는 새> 中, 문학과지성사, 1985)


임씨와 동업하여 국화를 재배하던 초기만 해도 글을 쓰며 원예 농원을 한다는 거창한 꿈을 꾸었지만 곧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꿈임을 알자 '나'는 절망한다. 기술은 전수받지 못했고 투자금도 회수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즈음 우연히 서울에서 무용학과를 다니는 여대생이 물에 빠진 것을 구해주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둘은 몇 번의 밀회를 갖는다. 어느 날, 여자가 서울로 함께 떠나자는 말에 '나' 역시 떠나야 하리라는 예감에 응낙한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여자가 오는 모습을 본 '나'는 몸을 숨기고 만다. 실패로부터 떠나려는 마음과 여자와의 동행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자 역시 나를 기다리지 않고 버스에 오른다. 그녀 역시 자신의 문제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시흥으로가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어린 기생을 껴안고 잔 후 서울로 온 '나'는 서울이 정든 노예선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다.


o 새의 肖像(원문 <부활하는 새> 中, 문학과지성사, 1985)


'나'는 팔색조(八色鳥)를 찾으러 작은 섬에 갔다가 그녀를 만난다. 사실 꼭 팔색조를 찾겠다는 결심은 아니었으나 굳이 팔색조를 찾는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우려 한다. 섬으로 들어갔다가 막배 시간에 슬렁슬렁 대다가 놓친 '나'는 민박에 드는데 그곳에서 여자를 만난 것이다. '나'와 여자는 술을 나눠 마신다. 그녀는 '나'에게 "날 박제로라도 해서 갖고 싶으신가요? 그건 안 될 말이에요. 오늘밤만 우리는 서로의 것이에요" 라고 말한다. 관계를 갖고 난 다음 날 둘은 따로 섬을 빠져 나온다. 

다음 날 우체국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알은 채를 하지만 그녀는 '나'를 외면한다. 문득 '나'는 그녀의 섬에서의 행동은 결코 일상의 행동이 아니었고 사로잡힌 몸으로서 새로이 자유롭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음을 깨닫는다. 일상의 그녀를 찾은 나는 그녀를 내 박제로 하려던 데 지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섬에 팔색조가 깃들이는가, 안 깃들이는가. 그대의 마음이 영원히 그 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자 원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o 검은 숲, 흰 숲(원문 <부활하는 새> 中, 문학과지성사, 1985)


크리스마스 이브, 충청도 지역에 관한 개괄서를 쓰는 일을 맡게 된 '나'는 마침 중원군에서 발견된 비석에 대한 취재를 앞두고 있다. 우연히 올갱이국을 먹기 위해 들른 집에서 일하는 계집아이가 교회에 가기 위해 위험한 고개를 넘겠다며 떼를 쓰는 것을 듣는다. '나'는 자청하여 주인 여자를 설득하여 계집아이를 데리고 고개를 넘는다.

검은 숲을 넘으며 '나'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예전의 여자를 생각 한다. 그녀는 5년에서 7년을 기다려 달라고 했고 모국어로 편지를 쓰며 절절한 감상을 보내오더니 2년이 지나자 루드비히라는 독일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은 '나'는 그녀를 기다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치 숨겨둔 패를 보여주지 않은 도박꾼과 같은 심정을 느낀다.

고개를 넘던 '나'는 앞서 가던 스님을 불러 말동무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교회에 다닌다는 소녀가 다른 종교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여 '나'는 눈치를 보게 된다. 스님은 뜻밖에도 호의적인 태도로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말을 한다. '나'는 카톨릭과 개신교, 불교를 전전했지만 모든 것이 엉터리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웅얼거린 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가자 가자, 높이 가자, 더 높이 가자는 그 말을 떠올리며 '불쌍한 녀석, 불쌍한 루드비히'라고 말하려다가 루드비히에 들어갈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다. 눈이 쏟아져 흰 숲이 되고 있었다.


o 원숭이는 없다(원문 <원숭이는 없다> 中, 민음사, 1989)


아파트 정기소독으로 집에 있을 수 없게 된 '나'와 연출가 김, 배우 김은 공원에 모인다. 셋은 이렇다 할 직장 없이 마누라 등을 쳐서 먹고 사는 '등처가' 처지이다. 무슨 얘기 끝에 월남 이야기를 하고 원숭이 골 요리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어릴 적 의붓 아버지와 함께 곡마단 구경을 가서 원숭이를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원숭이에게 우호적인 포즈를 취한 것이 원숭이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는지 원숭이는 손을 뻗어 스웨터 자락을 움켜쥐며 위협했고 그 후로 '나'는 자신이 아무리 외로운 상태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고 함께 나누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나'는 충동적으로 두 김씨를 부추겨 원숭이를 구경 가자고 한다. 연출가 김은 집으로 돌아가고 배우 김은 따라 나선다. 장터에 가면 원숭이를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올라탄 택시에서 둘은 각자의 상념에 빠진다. 문득 자기보다 아래 위치로 보았던 배우 김이 생각하는 바가 자신의 생각과 비슷함을 알게 되자 '나'는 불쾌함을 느낀다.

막상 도착한 장터에 원숭이는 없었고, '나'는 이제 원숭이 따위는 괘념치 않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배우 김은 원숭이를 보는 것에 집착한다. 술집 아낙에게 원숭이를 데리고 다닌다는 약장수가 사는 곳을 물어 둘은 그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은 빈 동네였고 유일하게 한 가구만 남아 살고 있었다. 그곳 사내는 원숭이 운운하는 둘에게 마뜩찮은 표정으로 대했고, 함부로 돌아다니다가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총을 맞게 되리라고 경고한다. 둘은 두려움에 길을 되짚어 가는데, 문득 서로의 얼굴을 보고 놀라고 만다. 둘 다 원숭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은 자신들이 어떤 힘에 의해 봉쇄되고 무력하게 되었으며 진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며 극도의 공포 속에서 사력을 다해 걸음을 옮겨 놓는다.


o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원문 <돈황의 사랑> 中, 문학과 지성사, 1983)


아버지의 묫자리를 향하는 버스는 위험한 벼랑길을 위태롭게 달렸고, 아버지가 '나'에게 어눌한 말로 유언과도 같이 내뱉은 '법을 공부해라, 늦지 않았다'는 말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변호사였으나 모종의 일에 연루되어 자격정지 5년을 받는다. 집안 살림은 급격히 어려워져 급기야 봉천동 인근의 집에다가 돼지와 닭 따위를 키우기에 이르고, 돼지를 먹이기 위해 마차를 사들이는데 말은 족보가 있는 말이라 했다. 당시 큰아버지뻘 되는 이가 기식하고 있었는데 그가 마차를 몰겠노라 하였다. 하지만 혈통있는 말은 곧 경주에 쓰일 때 의미가 있을 뿐 마차를 끌기에는 적당치 않았고 큰아버지도 그 말을 다룰 역량이 되지 못함이 판명된다. 마차는 팔리고 큰아버지도 떠난다. 

당시 '나'는 시를 쓰고자 했고 실존주의적 고민을 했었다. 그는 그런 실존주의적 고민에서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는 케플러의 가설을 믿고자 한다. 

법을 공부하길 바라는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우던 나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자존심 싸움을 한다. 아버지는 자격정지가 사면으로 풀리자 큰소리를 치지만 왠일인지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그 모든 것이 사무장의 농간과 사기 때문임이 밝혀진다.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쓰러진다. 재기를 위해 일어선 후에도 사무장에게 고용된 사실이 드러나 또 다시 자격정지를 받고 아버지는 끝내 자리보전을 하게 된다. 

어느덧 아버지의 묫자리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몰락과 파멸을 자신의 신념으로 자초했다면 그 인생 또한 패배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변호사 아버님'이라 나직이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별은 어떤 음악 소리를 내며 빛날지 생각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6864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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