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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페로 가는 사람 - 창비소설집
김승희 지음 / 창비 / 1997년 8월
평점 :
품절
o 산타페로 가는 사람(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화자는 미국의 작은 도시 이블린의 세계예술가대회에 석 달 예정으로 참가한다. 참가자들 중 일부가 20세기의 문명이 오염시키지 않은 순수원초의 미가 남아있는 산타페에서 마지막 이별파티를 하자고 권했지만 아직 참가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 '나'는 유언과도 같은 '에미의 마지막 간청'이라는 말에 동생의 보증을 서 주었는데, 그 보증이 잘못 되어 집에 차압이 들어오기 직전이다. 돈을 가져다 쓴 동생은 뻔뻔스럽게 빚문제 해결을 종용해왔고, 그나마 빚을 가져다 쓴 것은 동생과 상관도 없는 엉뚱한 사람이었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CNN에서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뉴스가 보도된다. 산타페로 가겠느냐는 일행의 마지막 물음에 '나'는 뉴스와는 무관하게 집안 일을 처리해야 하므로 갈 수 없다고 답한다. 어두운 밤하늘의 색채가 정선아리랑을 부르는 것 같다고 느끼며 집으로 가야지라고 중얼거린다.
o 호랑이 젖꼭지(1994년 문학사상 12월호)
어머니 탈상을 마친 후 명수는 동생 명희와 백두산 호랑이를 보기 위해 과천에 간다. 아버지는 은행 지점장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명퇴를 당했고, 낙향해서 지내는 동안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어머니와 헤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혼 요구에 응하지 않으며 아버지를 기다렸고, 죽는 순간까지 이혼을 해주지 않는 어머니를 아버지는 오히려 가해자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곰과 같은 여자라서 아버지를 빼앗겼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수차례 반복되는 심장 발작으로 결국 돌아가셨는데 119 구급대가 오기까지의 짧은 순간 동안 혹시 아버지가 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화장을 했다. 그 화장은 '분가루를 바께쓰에 담아 마구 쏟아부은 것 같은 얼룩덜룩한 그런 것' 이었다.
명수는 곰처럼 사람이 되기 위해 인내의 세월을 견딘 것이 아니라 야성으로 뛰쳐나간 백두산 호랑이를 보고 싶어진다. 곰과는 대비되는 새로운 여성상인 호랑이를 보며 '정신의 비타민'을 섭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공원에서 막상 대면한 호랑이는 서너살이 된 새끼 호랑이로 마냥 잠만 잤고, 우렁차게 울려퍼지던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녹음된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명수는 명희와 함께 리프트를 타고 내려오며 명희가 알고 지내던 마이클이 사실은 동성애자이고, 명희가 동성애자로부터 느꼈던 관계의 안온함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 둘은 백두산 호랑이처럼 리프트 위에서 '어흐응, 어흐응' 하고 울부짖어본다.
o 아마도(1995년 소설과사상 여름호)
오월, 아카시아 필 무렵이면 그녀는 언제나 봄을 앓는다. 아카시아꽃 덩어리는 언제나 악몽 같은 향기로 그녀에게 기억된다.
80년 5월의 봄날, 그녀와 숙경은 종로5가를 지나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을 찢고 한사람이 무언가를 절박하게 외치며 건물 옥상에서 투신 자살한다. 남자가 뿌린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글에는 광주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후로 그녀와 숙경은 평온한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그 일 이후로 숙경은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1년 만에 헤어진 후 자신의 몸에 더러운 벌레가 있다며 비누와 살충제를 먹으며 수시로 병원 신세를 진다. 숙경은 여러차례 이름을 바꿔가며 가족들에게 백안시되며 살아간다.
그녀는 당시 만났던 성형외과 의사 미스터 리가 피력한 성형에 대한 견해, 신이 만든 인간 육체의 미완성을 보완하고 수정한다는,에 대해 5월 광주가 던진 거대한 충격에 비하면 너무나 하잘 것 없이 느껴져 끝질긴 구애를 거절한다.
이후 허균에 대해 연구하며 대학원을 보낸 그녀는 허균이 말한 율도국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마도 있을 수도 있고, 아마도 없을 수도 있다", 다만 그 답변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 결정될 것이라 생각한다.
80년으로부터 15년여가 흐르고, 미스터 리가 첫 아내를 사별하여 다시금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자 그녀는 약속을 잡는다. 약속 시간이 가까와올 무렵, 숙경이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녀는 미스터 리와의 약속장소를 지나치며, 조카가 호주로 번지점프를 하러 가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자신의 온 몸을 내던져 시대의 아픔을 고발했던 15년 전과, 이제는 자신의 몸을 던져 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간극에 대해.
o 회색고래 바다여행(1996년 문학사상 9월호)
10여년간 문화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던 유미환은 어느 날 가정면으로 발령이 난다. 90년대가 되면서 문학 지형은 '어서 빨리 역사니 민중이니 항쟁이니 구질구질한 것에서 탈출해서 좀 고급하게 포스트모던해지자'고 결정하기라도 한 80년대를 '청산'해 버리고 말초적 상업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던 때여서 유미환은 발령과 함께 많은 생각들을 한다.
이러한 고민과 일에 대한 불만족이 표정에 드러나기 시작하고, 문제적 인물이 되어가던 무렵에 회사에서 유미환에게 60년대에 히피운동이 일어났던 대학촌에 일년 간의 연수를 보내준다. 거친 파도가 보이는 바다로 가고 싶었으나, 유미환이 도착한 곳은 '베이'로 괄호 모양의 땅 안에 갖힌 온순한 바닷가 부근이었다.
어느 날 새벽에 레이 타호바라는 미국인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몬트레이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는 강채청의 친구가 아니냐 묻더니, 그녀가 지금 무척 앓고 있으며 한국인 친구가 방문해 도움을 주길 바란다. 길을 잘 모르는 유미환은 미국에서 사귀게 된 경파를 동행해 채청의 집을 방문한다. 레이 타호바는 채청이 맥도널드 햄버거집에서 한 한국인과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눈 뒤 혼절한 후 계속 앓고 있다고 말하며, 그녀가 끄적인 글들과 말들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채청은 80년 5월에 광주에 있었고, 당시 고3 학생이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한 처녀가 대검에 한 쪽 젖가슴이 도려내지는 그림이었고, 광주민중항쟁 사망자 명단 54번 손옥례라 쓰여 있었다. 그리고 공책의 다음 페이지에는 옥례라는 이름의 무한 변주가 어지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유미환은 그것을 어떻게 레이 타호바에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고, 경파가 떠듬떠듬 설명해 주자 레이 타호바는 전쟁도 아닌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데 대해서 잘 이해 하지 못한다. 경파는 방글라데시에서는 대통령을 살인죄로 판결 확정지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남한에서는 내란음모죄라는 아리송한 단어로 책임자 처벌도 못하고 벌써 일부 국회의원이 사면 얘기를 꺼내는 상황에 분개한다.
되돌아오는 길에 유미환은 경파가 말한 고래들에 대해 생각한다. 고래는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상승한다. 생존을 위해 상승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작살에 꽂힐 수도 있다.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많은 것들은 자기 안에 품고 있다. 그녀는 고래들이 가는 방향이 곧 자신들이 가는 방향이며 고래들이 울리는 북소리를 느낀다. 그녀는 오늘은 익사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o 아나바스 스칸덴스(1994년 작가세계 봄호)
시카고의 어느 문화재단에서 주관한 '문학의밤'에서 화자인 '나'는 카렌-히로꼬-뮈컨헨라는 이름의 젊은 시인을 만난다. 그녀가 낭독한 <뜨게질하는 사람> 연작시를 듣고 '나'는 자신의 어머니가 수예점을 하며 어렵게 자신을 키운 과거를 떠올린다. 카렌의 시 속에서 한국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그녀에게 말을 붙이고, 카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카렌은 한국에서 입양되어 미국으로 왔고, 일본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난다. 어느 날 공원에서 뜨게질하는 여인을 본 순간, 입양되기 전 뜨게질하던 어머니의 영상 한 자락이 떠오른다. 카렌은 뜨게질하는 여인에게 영어로 질문을 하고, 여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답한다. 그녀가 '나'에게 건네준 명함에는 아나바스 스칸덴스라는 물고기에 관해 적혀 있었다. 그 물고기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강에서 나와 언덕으로 올라 마른 육지를 이리저리 다니는데, 때로는 그 거리가 1킬로 반이나 된다고 한다. 물고기의 골에는 달팽이와 같은 뼈가 있어 그곳에 물이 저장되었다고 한다.
o 聖 브래지어, 1994년 7월 9일(1994년 문학정신 8월호)
아침 나절에 딸아이가 학교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가려했다가 남편이 딸아이의 뺨을 때리는 소동이 빚어진다. 아이는 중학 1학년 또래 치고는 큰 편이어서 남편과 '나'는 브래지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딸아이는 딸아이대로 자신만 브래지어를 하고 학교에 가서 당하는 놀림이 싫은 것이다. 남편이 손찌검한 이유가 딸아이가 정숙하지 못한 것으로 비춰져서인지, 아니면 가장인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고 느껴서인지 생각해본다. 상념은 브래지어에서 더 이전의 속옷으로, 파운데이션이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확장된다. 딸아이와 어설픈 화해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호외를 보게 된다. 그리고 사회의 파운데이션에 대해 생각한다.
o 제목을 붙이지 않은 오페라(1994년 현대문학 9월호)
한여름의 저녁 무렵, 한강대교 난간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흰 원피스에 하얀 신발을 신은 그녀는 마치 강으로 뛰어들 것처럼 보였다.
에스페로에 타고 있던 남자는 그 여자를 보면서 자살해버린 자기 여동생을 생각한다. 여동생 옥연은 다섯살 난 아들이 아파트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발목을 잡으려 했으나 허공만 움켜쥐고 만다. 다행이 아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옥연은 며칠 후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그녀는 그림을 그렸는데, 민중미술을 하는 남편을 만난 후 남편의 그림 스타일로 바뀌더니 어느 날 절필하고 만다. 남자의 상념은 자기 자신으로 옮겨 간다. 남자는 거래선을 트기 위해 아프리카 이곳저곳을 갖은 고생을 해가며 돌아다닌 후 귀국했는데 출세는 커녕 최근 명퇴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이 사회에서 빽과 줄이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편 버스 위에서 졸다가 다리에 서 있는 아가씨를 본 아줌머니는 집나간 딸 명희를 생각한다. 아주머니는 외무부에 다니는 고위 공무원 집에 파출부를 다니고 있다. 그 고위공무원이 이탈리아로 발령을 받게 되자 음식 솜씨가 좋은 아주머니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고, 8월이면 아주머니도 한국을 뜨게 된다. 그 전에 명희를 꼭 보고 싶었다. 명희는 무용을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집안 형편이 뒷받침 되지 못했고, 포악한 오빠에게 시달리기만 했다. 아주머니가 어느 날
o 13월의 이야기(1997년 소설과사상 봄호)
레모나 시티에서 살아가는 교포 1.5세 김성일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경찰은 김성일에게 수십발의 총격을 가했고, 교포 사회는 동요에 휩싸인다. 하지만 언론은 경찰에게 유리한 발표만 거듭하였고, 법원은 판결을 미루다 결국 네 명의 경찰 모두가 불기소처분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낸다.
성일의 친구와 그들의 가족, 한인들과 흑인, 그리고 라티노들과의 관계, 미국 사회에서 황인종의 권리 수준 등이 이야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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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 알고 있던 김승희의 소설집 <산테페로 가는 사람>이 나왔을 때 책을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 2009년인가 샀었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2012년에 읽게 되었다. 좋았던 작품은 <호랑이 젖꼭지>와 <회색고래 바다여행>이었다.
<호랑이 젖꼭지>는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을 읽고 난 후에, 여성을 곰의 후예가 아닌 호랑이의 후예로 상정하여 전개시킨 점이 독창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박진규는 김승희의 소설을 차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라 실피드> 이야기와 해석이 특히 흥미롭다. 제임스는 결혼식 바로 전날 날개 달린 실피드를 알게 된 후 약혼자 에피를 냉대한다. 결국 제임스는 에피를 버리고 실피드를 좇아간다. 하지만 실피드는 땅 위로 내려앉지 않았고, 제임스는 마녀에게 부탁하여 실피드를 인간으로 만드는 약을 받아 스카프에 바른다. 스카프를 두른 실피드는 땅으로 떨어져 죽어버린다. 한편 에피와 그녀의 충직한 숭배자인 거언은 결혼한다. 김승희는 실피드가 에피의 낭만적 자아, 제임스가 거언의 환상적 자아가 아닐까 생각하며 결혼은 에피와 거언과 같이 땅 위에 발 딪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결합이어야 한다는 걸 암시한다고 해석한다.
<회색고래 바다여행>은 예술에 대한 김승희의 탐구이다. 80년 광주를 간접 경험한 화가가 미국에서 그 기억 때문에 심하게 앓게 되는 상황과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기자가 느낀 90년대 문학 지형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한 사회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 나오는 '터널'과 같이 하나의 터널을 지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올 것처럼 80년대 문학을 '청산' 해버리고, 상업주의에 물들어 유행에 편승하는 시류를 통탄한다.
작가는 후기에서 "우리를 자유롭고 평화롭고 순수하고 행복한 한 개인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여러 힘들......이 거대한 힘의 실체 - 그건 사회,정치적 억압과 역사적 악몽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적 신화라는 정체 모를 당연성이기도 하고 성차별, 지역차별, 맹목적 가족중심 이데올로기, 연고주의와도 같은 몽매의 편견이기도 하였다"(318p)라고 하면서도, 권력이 연출하는 역사의 횡액은 어느 땅에서나 되풀이되는 보편적 구조를 가진 것(319p)이라고 말한다. 결국 일레인 킴의 말처럼 "한(恨)이 있는 곳에 집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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