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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눈뜰 때 ㅣ 장정일 문학선집 5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열 아홉살,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턴테이블을 가장 가지고 싶었던 주인공 '나'는 원하던 대학에 미끄러진 후 재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고등학교 때 시화전에서 알게 된 여자친구 은선은 최승자 스타일의 시를 썼는데, 처음 관계를 맺던 날 '나'에게 앞으로 '아담'으로 부르겠다고 한다. 시험이 끝나고 발표가 날 때까지 둘은 서로의 몸을 탐한다.
87년 대선 기간 동안 비판적 지지의 편에 가담했던 주인공의 형은 스스로를 이기적인 사람이라 평가하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린다. 은선은 이별을 통보하며 대학에서 좀 더 즐길 계획이고 시인으로 등단하겠다고 말한다.
어느 날 친구가 기도로 있는 디스코텍에서 만난 고등학생 현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둘 다 스탠다드 록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둘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딱히 만날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만나게 되면 서로 관계를 갖는다.
가지고 싶던 세 가지 중 턴테이블은 오디오 가게의 호모 사장과 하룻밤을 지낸 후 얻게 된다. 두번째 뭉크화집은 디스코텍에서 만난 중년의 여성 화가의 야릇한 모델일을 해주고 얻는다. 하지만 그 화집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춘기>가 찢겨져 나가고 없었다.
은선이 종북주의의 시를 발표하여 구속된다. 은선은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운동권 써클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박탈당한 채 집체 시에 이름을 빌려주었던 이야기를 한다. 우연히 만난 현재와 관계를 맺은 일주일 후, 그녀는 투신 자살한다. '나'는 현재에게 자기의 수치스러웠던 일을 모두 얘기한 것이 그녀를 존중하지 않았던 비겁한 행위었다고 생각한다.
공부에 매진한 나는 결국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을 포기한다. 서울역에서 창녀를 사서 밤을 보내고, 창녀는 '나'를 배웅해준다. 등록금의 일부를 헐어 타자기를 산 나는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다.
표제작인 <아담이 눈뜰 때>는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이다. 가지고 싶었던 세 가지는 램프의 지니가 들어 주는 소원을 연상시킨다. 타자기와 턴테이블, 화집은 각각 문학과 음악, 미술을 상징하는 것일까? 셋 중 주인공이 비교적 정상적인 의지로 얻게 되는 것은 타자기이고 타자기만이 생산을 해내는 도구이다. 턴테이블과 화집은 소비의 도구(매체)이다. 독학자인 장정일이 록음악의 연주자가 되거나 화가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진로를 잡은 것은 작가의 길이다. 한편 뭉크 화집에서 <사춘기>만이 뜯겨져 나간 것은 사춘기를 겪지 못한 작가 자신, 혹은 시대 자체를 웅변하는 것 같다.
<아담이 눈뜰 때> 외에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을 읽은 남녀가 7일간 <창세기>의 조물주가 세계를 창조하듯이 갖가지 에로티즘의 이론을 그로테스크하게 체험하는 과정을 그린 <제7일>, 소설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뒤로 한 채 대가족을 책임지던 은행원 큰아들이 죽어버린 사건을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스타일로 그려낸 <아이>, 여관에서 살아가는 모기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고발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임무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모기>, 실크 커튼이라는 반투명한 막을 매개로 '다리가 예쁜' 창녀와 '폐병쟁이'가 관찰/피관찰 하는 모습을 그려낸 <실크 커튼은 말한다>, 어느 날 자기 집으로 날아 들어온 펠리컨을 학대한 죄로 공안 경찰에게 끌려가 고문 당하고 결국 죄를 내면화하는 <펠리컨>, 희곡 스타일의 세 가지 이야기인 <아버지를 찾아가는 긴 여행>이 함께 실려 있다.
장정일의 초기 작품집으로 자전적인 이야기와 실험적인 시도, 문학에 대한 고민들이 담겨져 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와 마찬가지로 성을 통한 탈출의 욕구, 운동권(혹은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혹은 부당한) 비아냥 등이 드러나 있다.
독학자는 종종 관심의 '폭'이 넓고, 그런 연유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문제는 독학자 특유의 자유로운 비판 의식이, 특정 권위의 내재적 관점을 도외시한 결과 비아냥과 조롱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장정일의 글들은 그가 정규 과정이 아닌 독학과 무지막지한 독서의 결과이므로 그만의 색깔이 있고, 신선함이 있다. 한편, 실천적 인식의 깊이가 아쉬울 때가 있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긴 여행>의 2번째 이야기인 <어머니>는 내가 연극으로 본 작품이었다. 나는 연극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즐기지도 않는 편인데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98년도나 99년도에 이 작품을 관람한 기억이 난다. 당시 '흰얼굴'로 출연한 배우가 함께 연극을 보러 간 친구와 고교 동창이었고, 그런 인연으로 관람했었는데 꽤 훌륭했다고 느꼈었다. 함께 연극 관람한 친구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당시 관람했던 연극의 제목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이 책을 읽다가 당시 내가 본 연극이 장정일의 원작을 극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정일의 재기발랄하고 파격적인 사고가 흥미로워 <장정일의 독서 일기> 1권도 함께 샀다.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59958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