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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놀이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박종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살인죄로 기소되어 수감된 주인공이 자신의 변호사 피아르테스에게 범행 동기에 관해 편지를 쓴다.
주인공 나는 1932년 8월 오늘날의 폴란드령인 슈테틴에서 사탕공장 사장의 아들로 태어난다. 어머니는 사교계의 화려함을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사탕공장의 경영과 이 회사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아주 어린애라고만 볼 수는 없는 나이임에도 공장의 여직공과 나는 이를 외면한 채, 어린애를 껴안는다는 설정으로 성적 유희를 주 1회 즐긴다. 나는 이 연극을 통해 인생의 아슬아슬한 쾌락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독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며 피난을 가게 되었고 사장 아들로서 누리던 이점들은 사라졌으며 어머니가 사망한다.
아버지가 우표판매점을 하는 과부와 살게 되자 나는 이복동생 '후레자식'을 제어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버지 넥타이를 나의 소행으로 보이도록 잘라놓는 도박이 이복동생의 음험한 모함으로 비추도록 만드는데 성공한 이후 나는 놀이(spiel)의 재미에 심취한다. 우표판매점에서 우표를 몰래 훔쳐다 팔면서 이복동생에게 이권을 주기도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발을 빼서 불미스러운 사태는 맞지 않았는데, 이복동생은 적발 당해 우표 절도 혐의가 뒤집어 쓰게 된다.
서독에서 미군 구호물자를 빼돌려가며 법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할 즈음 아버지와 과부가 가진 재산을 몰수당했다는 증명서와 함께 서독으로 탈출하자 교묘히 아버지와 과부의 법적 혼인을 방해해 유산의 유일한 상속자가 된다. 시골 변호사사무소에서 경력을 쌓은 후에 정치판에 뛰어들어 놀이를 이어 나간다.
나는 나폴레옹에 대해 자주 생각하며 자신과 비교한다. 혹자는 나폴레옹의 가장 큰 실수가 러시아를 침공한 것이라고 하는데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더 이상 놀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의 승패 여부와 상관없이 결행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놀이꾼은 놀이 이후 주어지는 상급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놀이 과정 자체에서 느끼는 충족감을 즐길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베를린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놀이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어느날, 자신이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만다. 놀이의 결과로 주어지는 상급은 쌓였지만, 놀이 자체는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구를 치면서 다음 놀이를 구상하고 결국 정치를 택한다. 정치는 20년간을 놀이터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너무나 뻔한 전개로 나는 따분함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를 살해하는 놀이를 생각해낸다. 나는 현대의 재판정에서는 살인의 동기, 살인으로부터 주어지는 이득 등이 설명되지 않을 때 형을 집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무나 평범하여 나와 어떤 연관도 짓지 못할 인물 찾기에 골몰하고 마침내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감옥에 갖힌 나는 변호사에게 편지를 보내 법정에서 어떤 도식화된 틀에 자신의 범죄를 짜맞추고 그 결과로 형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편지를 쓰는 것이다.
마침내 법정은 나의 무죄를 선고하고, 풀려난 나는 변호사에게 또 다른 놀이의 상대가 되어 줄 것을 제안한다.
만약 KOEI 사의 삼국지나 신장의야망을 플레이한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주인공의 놀이에 대한 태도를 100% 이해할 것이 틀림 없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KOEI 사의 삼국지2를 접한 후 새로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나는 매번 열광했다. 하지만 엔딩을 보기 위해 노력한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삼국지 시리즈가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변의 땅들을 이제 하나 둘 정복해 가는 그 시점이다. 특히나 휘하 장수와 돈이 부족하여 전쟁과 내정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마침내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재미 있다.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전략과 전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이 서너개를 넘어서고 전쟁에서 패배가 거의 불가능한 시점까지 가면 기계적인 플레이로 변하고, 흥미는 반감되며, 엔딩을 보겠다는 욕구 보다는 좀 더 어려운 상황에서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고자 하는 생각이 더 매력적으로 나를 유혹한다.
주인공은 놀이의 결과보다는 승산이 없는 놀이에 뛰어드는 그 상황에 열광하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 예측할 수 있도록 자신이 상황을 조정해가는 노력 사이의 긴장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일반 대중과 분리시키는데, 자신은 시간과 자아를 주체적으로 활용하고 운명을 끊임없이 재조정해가는 '주체'로서의 놀이꾼으로, 대중은 주어진 여가와 자유시간마저 레저산업에 고스란히 반납하고 마는 '객체'로서의 노예로 구분한다. 게다가 법질서 역시 경제적 토대의 바람직한 반영으로서의 상부구조이므로, 상식을 벗어난 의미 없는 범죄행위에 대해서 법정이 처벌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놀이로서 이용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블랙 유머를 통해 작가는 현대인이 노예제사회의 노예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 신봉하는 법과 질서 역시 허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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