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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ㅣ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전후 일본의 도쿄, 잡지에 잡문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3류 소설가 세키구치가 기괴한 이야기를 듣는다. 유서깊은 산부인과 가문의 데릴사위가 어느날 연기처럼 증발해 버리고, 그의 아내는 20개월째 출산을 하지 못한 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세키구치가 고서점을 하는 친구 교고쿠도에게 이 기괴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사변을 늘어 놓으며 논평을 한다. 인간의 뇌와 마음, 그리고 이를 중계하는 인식이 있는데 인간의 감각이 뇌에 인식되는 과정에서 취사 선택이 일어나기 때문에 왜곡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 양자역학의 예를 들면서 관찰자가 사물에 개입하는 순간 그 사물의 운동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타자의 존재 없는 실재'란 없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취재해서 잡지사에 기고하려던 세키구치의 애초 계획은, 기사가 게재된 후 그 집안이 풍문에 시달리고 진실이 곡해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중단되고 만다. 그런데 그의 친구이자 탐정인 에노키즈에게 구온지 료코라는 여성이 사건을 의뢰해 온다. 에노키즈는 유산을 물려받아 한량과 같이 살고 있는 인물로 취미 삼아 탐정 간판을 내걸고 있는데, 뜻밖에도 몇 건의 사건을 별다른 수고도 없이 해결한 전력이 있다. 그 이유는 에노키즈가 타인의 기억을 읽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료코는 에노키즈가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료코는 자신이 교코라는 여성의 언니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녀의 집은 유서깊은 산부인과인 구온지 집안으로 다름 아닌 괴소문의 발원지이다. 어느 날 동생 교코와 그녀의 남편 후지마키가 심한 다툼을 벌인 뒤 후지마키가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는데, 다름 날이 되어도 그가 밖으로 나오지 않자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교코가 산기를 느꼈는데 20개월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고 배는 산처럼 불러만 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에노키즈는 료코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두 가지 질문을 하는데, '사건을 의뢰할 생각을 한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세키구치와 구면이 아닌지' 였다. 질문의 의도가 짐작이 가지 않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구온지 저택을 방문한 에노키즈는 문제의 방을 조사하더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따윈 아무것도 없고 경찰을 부르라는 엉뚱한 말을 하더니 돌아가버린다.
료코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낀 세키구치는 자신만이라도 도움을 주겠다면서 여러가지 조사를 하는데 조사 과정에서 여러가지 사실들을 알게 된다.
사라져버린 후지마키는 세키구치의 1년 선배로 의학을 지망하는 조용한 청년이었다. 후지마키는 학창 시절 교코를 보고 한 눈에 반해 세키구치를 통해 연애편지를 전달했고, 답장을 받은 후지마키는 교코와 몇 차례 만남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교코에게 청혼을 하려고 구온지가를 찾아 갔으나 거절 당하고, 대신 의사면허라도 따가지고 온다면 혼인을 승락해주겠다는 말을 듣는다.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후지마키는 의사면허를 땄고 참전을 하였으며 종전 후에 다시 구온지가를 찾아가서 마침내 승락을 받고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 이후 교코과 후지마키는 격렬한 다툼을 거듭하한다. 후지마키가 10년 전의 연애편지 이야기를 꺼내면 교코는 그 따위 것은 알지 못한다며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한편 구온지가에는 나이토라는 젊은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교코의 배우자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번번히 의사면허에서 낙제 하고 때마침 후지마키가 나타나자 밀려난 것이다. 교코는 나이토와 불륜 관계였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구온지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사라지고, 구온지가의 집안 내력이 빙의계였던 것이 알려지자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세키구치는 잊었던 옛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것은 자신이 교코에게 연애편지를 전해주던 날, 교코가 자신을 유혹하여 관계를 맺었던 기억이다. 아이 실종 사건으로 경찰 개입이 임박하자, 세키구치는 구온지가의 저주를 풀어달라며 교고쿠도를 설득한다.
마지못해 승락한 교고쿠도는 다음 날 사건 현장인 방으로 가서 저주를 풀어주는 듯한 주문을 왼다. 그리고 교코의 배가 찢어지고 그 속에서 증발했던 후지마키가 태어난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을 잃은 세키구치에게 교고쿠도의 설명이 이어진다. 후지마키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방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시체는 오직 교코, 료코, 그리고 세키구치의 눈에만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 시체를 보았으면서도 의식의 한 부분은 거부를 했기 때문에 못 본 것으로 가상현실을 재구한 것이다.
구온지가는 대대로 무두아를 출산하는 유전적인 결함을 가진 집안이다. 불구의 아이가 태어나면 태아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료코의 어머니 역시 무두아를 출산하고 돌로 죽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료코는 다행히 무두아는 아니었지만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로 태어났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반면에 교코는 괘활하고 건강한 아이었다. 료코는 때때로 의식을 잃는 경우가 있었는데 집안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던 변태성욕의 의사가 흰독말풀을 이용하여 료코를 능욕했기 때문이었다. 료코는 자신의 인격을 동생인 교코로 분리하였고 세키구치에게서 편지를 받을 때 교코의 인격이었던 것이다. 료코는 교코로서 세키구치를 유혹하고 후지마키와 관계를 가졌으며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무두아였고, 집안의 관습대로 료코의 어머니는 무두아를 돌로 내리쳐 죽이고 만다. 그리고 료코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무두아 시체를 포르말린에 담아 침대 머리맡에 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료코는 자신의 인격을 다시 한번 분리하여 어머니 인격을 창조하였고 병원에서 아이를 훔치고 돌로 내리쳐 죽인다.
한편 료코와 관계 맺었던 사실을 몰랐던 후지마키는 전쟁 중 부상으로 성불구가 되었고, 아이를 낳고 기를 수만 있다면 모든 관계가 정상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연구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교코는 욕구불만으로 나이토와 관계를 맺으면서 후지마키의 마음을 돌리려는 비뚤어진 행동까지 하게 된다. 어느날 교코와 나이토가 정사 중일 때 후지마키가 연구 완성을 알리러 들어왔고, 다툼 끝에 교코가 나이프로 후지마키를 찌르고 만다.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기모노를 입은 료코는 후지마키의 눈에 어머니로 보였고, 어머니라는 말에 료코의 인격은 아이를 돌로 쳐 죽이는 역할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무두아를 침대 맡에 놓았던 것처럼, 교코의 침대 맡에 후지마키의 시체를 놓아두었고, 시체는 시랍되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된 것이다.
1994년 교고쿠 나츠히고 자신이 직접 출판사로 들고 간 작품으로 장편 처녀작이다. 그리고 처녀작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치밀한 구성과 다방면의 고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은 우부메의 전설을 모티프로 하여 인식론, 양자역학 등을 차용하는데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데는 취사선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유로 사물 자체를 완전히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기억에 남지 않고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날 수도 있고, 겪었던 일이라도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필경 인간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이러한 취사선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어쩌면 지옥으로 변할 지도 모른다. 양자역학 이론 역시 이런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수단이다. 양자와 같이 작은 것은 운동량을 관측하면 위치가, 위치를 관측하면 운동량이 확실치 않게 되어 불확정성의 원리가 도출된다. 이로써 사물은 관찰자가 개입하는 순간 관계를 맺게 되고, 관찰되기 이전의 상태와는 다른 형태와 운동을 지닌다는 이론이 가능해 진다.
이처럼 인식론과 불확정성의 원리, 혹은 타자 개념을 이용하여 교고쿠 나츠히코는 자신이 풀어나갈 허무맹랑한 이야기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가 몇몇의 눈에만 보이지 않았다거나, 상상만으로 임신을 20개월째 하고 있다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읽고도 작가가 미리 마련해 놓은 게임의 법칙 내에서 사고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변적인 전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면 무척 조잡한 소설에 그쳤을 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藤本進治 가 쓴 <인식의 발전구조> 생각나서 다시 펴 본다. 본문에 밑줄도 있고, 메모도 되어 있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서문의 "인식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에서 가장 개척되지 못한 분야의 하나이다... 진실되게 사색하기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현실로부터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는 당부만은 기억이 난다. 미래와 과거를 널뛰기 하면서 현실은 외면하는 요즘의 나에게 필요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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