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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물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o 편지와 쿨피스
주인공 나는 일정한 직업 없이 애인 아키코의 집에 얹혀 살고 있다. 하지만 곧 질려서 피트니스 센터의 접수 카운터에서 일하는 여자로 애인을 바꾼다. 나의 삶은 여자를 갈아치우고 그 여자의 집에 얹혀 사는 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수영부였던 나는 사귀던 여자 부원과 관계가 틀어진 후 수영복 도둑으로 몰렸고 그 사건을 계기로 수영부를 탈퇴한다. 하지만 어쩌면 탈퇴의 이유가 엄마의 죽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기요쓰키 나오라는 50대 여자가 때때로 편지를 보낸다. 원래는 엄마의 펜팔 친구였지만 엄마가 죽고 난 후에는 나와 편지를 주고 받고 있다. 그녀가 도쿄로 가는 조카를 한 번 만나달라는 부탁에 응한 나는 조카인 유리카를 만나고 그날 유리카를 집으로 데려가면서 '지금 당장 이 여자를 밀쳐내 어딘가로 도망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o 올리비아와 빨간 꽃
아이와 남편과의 일상에 싫증을 느끼고 있는 서른일곱 살의 나는 채팅에서 만나기로 한 남자들을 바람 맞히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예전에 좋아했던 남자인 '오카'씨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나이에 비해 자신의 몸매에 자신을 갖고 있던 나는 새로온 피트니스 센터 접수창구 아가씨의 외모와 몸매에 밀린다는 느낌을 받은 후 신경이 쓰여 수영 대표로도 뽑히지 못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화단에 조화를 심으면서 예쁘다고 말하는 딸아이의 말에 나도 예쁘다고 말하며 손뼉을 친다. 그리고 오카씨를 중얼거린다.
o 운동화와 처녀 소설
주인공 나는 단무지 회사에 다니다가 이제는 명예퇴직하고 고서점을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초보자의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자신이 그토록 찾던 소설책을 싼 가격에 매입했을 뿐만 아니라 피트니스 클럽의 카운터에서 일하는 젊고 예쁜 치마코와도 연인 사이가 된다.
어느날 치마코가 아이를 가졌다고 하자 가정을 버리고 그녀와 새로 출발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를 치마코에게 말하지만, 의외로 치마코는 아이를 지웠다면서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가 싼 가격에 샀다고 생각한 소설들은 자신만 그렇게 높은 가치를 매겼을 뿐 실제로는 헐값에 거래되는 책들이었다. 아내는 운동화를 사서 나와 함께 피트니스 센터에 나오겠다고 한다.
o 사모바르의 장미와 어니언그라탱
올해 일흔이 된 엄마와 매일 수영장에 가서 걷기 연습을 하는 주인공 나는 그곳에 오는 젊은 남자를 사모하고 있다. 엄마는 한 때 재능 있는 화가였지만 지금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서 주문받은 그림만을 그릴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와 동갑인 여자와 재혼하려 한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사모하던 남자가 여자를 차는 장면을 목격하고, 선을 본 남자에게 그날 밤 처녀를 버린다.
o 클랩턴과 납골 단지
남편 하루히코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 레이라가 죽고 난 후 하루히코도 자살한다. 그리고 레이라의 유령이 항상 내 주위를 떠도는 것 같다. 이런 저런 남자들과 관계를 갖은 후 아이가 생기면 낙태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센지의 친구가 진실을 말한다. 나는 하루히코와 결혼한 적도 없고, 레이라를 낳은 적도 없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다. 레이라의 유골을 담았다고 생각했던 과자 깡통엔 남자들에게서 받은 만엔 짜리 지폐만 가득하다.
o 플라멩코와 다른 이름
피트니스 센터의 지배인이자 수영강사인 나의 아내 사에미가 사라진 지 벌써 10개월 남짓이 되어 간다. 사에미는 어느날 부터 자신이 가쓰코라 주장하며 사에미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는 것과 같이 행동을 하고 있다. 기묘한 동거 생활을 계속하던 어느날 가쓰코라고 부른 그에게 사에미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아내는 다시 돌아온 것 같다. 그리고 사라진 것이 사에미인지, 가쓰코인지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모델하우스의 방명록에 내 이름인 신도 쓰구미를 쓸 뿐이다.
발리 여행 둘째날과 셋째날 읽었다. 피트니스 클럽에 다니는 인간 군상의 얘기들을 연작 소설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각 장의 주인공들은 다른 장에 교차하며 등장하는데, 타인에게 비춰지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르게 등장한다. 주인공 각각은 '실제 모습'과 '비춰지는 모습' 사이에서 긴장하고, 그들의 삶도 그 긴장관계 속에서 공허함을 드러낸다. 그들은 좁은 공간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도 관계 속에서 충만하지 못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편지와 쿨피스>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과 연애의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옮겨 다니는 피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망도 분명 가지고 있지만 그런 일상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올리비아와 빨간 꽃>, <운동화와 처녀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허구의 삶을 지향하다가 작은 일상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는 얘기이다. <올리비아와 빨간 꽃>의 주인공은 서른일곱살이면서도 처녀적 감상에 빠져 첫사랑마저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여자에게서 패배감을 맛보고 현재의 자신을 자각한 후 화단에 조화를 심으면서 '예쁘다'고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첫사랑 이름을 중얼거림으로서 현재의 삶의 변화 가능성만을 암시한다. <운동화와 처녀 소설>은 좀 더 극적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후 일견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모두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결국 아내와 함께 피트니스 센터에 다니는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 그것이 성공할지는 미지수이다.
<사모바르의 장미와 어니언그라탱>의 주인공은 첫 연애에서 처녀라고 놀림받은 후 인생에서 자신감을 잃어버린 주인공 얘기이다. 그녀가 처음 맞선을 본 상대에게 처녀를 버리는 것은 진부한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일까?
<클랩턴과 납골 단지>와 <플라맹코와 다른 이름>은 몽환적인 이야기이다. 실제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기에 사랑하던 남자와 가상의 아이를 가졌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주인공과, 자신이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린 사에미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 부조화를 겪고 있다. 과거를 극복해 나가려 하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거나, 현재를 인정하지 못하여 환상으로 도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매력적인 이야기들이고 잘 읽힌다. 다른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지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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