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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조나단 노엘은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고 누이동생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으며, 아저씨가 정해준 결혼상대는 4개월만에 사내아이를 낳은 후 튀니지에서 온 과일장수와 눈이 맞아 줄행랑 친다. 이런 불상사를 겪은 후 사람들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멀리 해야만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은행 경비원으로 취직하고 방 한 칸을 세내었는데 그는 그 방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남들은 불편해 마지 않을 좁은 방을 조나단은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꾸미며 흡족해했고, 드디어 그 방을 살 수 있을 만한 돈도 모아 이제는 은퇴 후 노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방 앞에 비둘기 한마리가 창을 통해 날아들어왔고, 조나단은 비둘기를 본 순간부터 그 동물이 주는 끔찍한 느낌에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비둘기가 혹시라도 몸에 닿을 까봐 한여름에 겨울 외투를 꺼내입고 은행에 출근한 조나단은 이제 자신은 그 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으며 평온할거라 생각했던 계획도 모두 틀어져버렸다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일을 하면서 실수를 연발하고, 가장 싼 호텔을 빌렸을 때 가지고 있는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고민하는 등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급기야 공원 벤치에 바지까지 찢기는 사건이 일어나고 어렵사리 근무시간을 채운 그는 호텔로 돌아가 정어리와 빵, 포도주, 치즈와 배를 더할나위 없이 맛있게 먹고난 후 <내일 자살해야지>라고 말하며 잠 속으로 빠져든다.
밤사이 폭풍우가 몰아치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전쟁 중 자신이 지하실에 갇혀 있다는 환상에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죽은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소리를 치려는 찰나, 요란한 빗소리에 제정신을 차린다.
그는 일어나서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서서 '자유 속으로 걸어'나간다. 그리고 되돌아온 방 앞 복도에 비둘기가 남겨 놓은 오물과 깃털이 말끔히 치워지고 비둘기 역시 자취를 감추었음을 발견한다.
작년 여름에 집에 쥐가 들어온 적이 있다. 새벽 2시쯤 들어온 쥐는 그저 움직이는 시커먼 덩어리였고 나는 머리 끝이 쭈뼛할 만큼 놀랐었다. 어디 한군데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쥐가 도망쳐 들어간 방문을 잠그고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후 회사에 출근했다. 겨우 문만 열고 쥐덫을 집어 넣어두었지만 그날 밤 쥐덫은 텅 빈채였고, 단지 그 방에 쥐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거의 공황 상태에서 다음날 밤 집에 돌아가길 포기하고 회현역과 서울역을 거쳐 숙명여대 입구까지 비가 오는날 여관을 찾아 전전했다. 회현역 인근 모텔은 성매매를 동반하지 않은 투숙을 거부했고, 서울역의 여관은 들어간지 5분만에 지불한 돈을 포기해야 할 만큼 더럽고 습했다. 결국 숙명여대역까지 걸어가 모텔에 들어섰을 때에는 우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흠뻑 젖어 자못 처량한 느낌 마저 들 지경이었다. 에어컨 앞에 옷을 널어 말리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설책을 읽는 중간중간 입으로는 내 처지를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비둘기>를 읽으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너무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다. 그리고 쥐가 들어온 그 사건이 뭔가 상징하기라도 하는 듯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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