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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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도시>

아내와 아이가 있었을 때 퀸은 서너권의 시집과 희곡, 평론을 썼고 장편소설 번역을 하였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가 죽고, 어느날 자신의 일부도 죽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그는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퀸은 윌리엄 윌슨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를 자기가 쓴 글의 작가라고 여기지 않았기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 글을 옹호하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밤, 탐정인 폴 오스터를 찾는 전화가 잘못 걸려오자 퀸은 자신이 쓴 추리소설 주인공인 탐정 맥스 워크를 떠올린다. 자신이 창조한 탐정 맥스 워크와 퀸은 닮기는 커녕 상반된 모습이었지만, 퀸이 맥스 워크와 자신을 동일시 할 때, 그리고 자신도 맥스 워크처럼 될 소질이 있음을 알 때에는 힘을 얻을 수 있었기에 사건을 맡는다.

사건을 의뢰한 사람은 피터 스틸먼이라는 사람으로 자신이 살해 위협에 처해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터 스틸먼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말을 하지 못하도록 그의 아버지(아버지 이름도 피터 스틸먼이다)에 의해 9년간 감금 당하였는데, 어느날 집에 불이 나는 사건으로 구조되고 아버지 스틸먼은 정신병원에 갖혀 13년이 지났다. 그런데 며칠 뒤면 그 아버지가 병원을 나오고, 그 길로 자신을 찾아와 살해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버지 피터 스틸먼은 보스턴의 명문가 출신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 종교학과의 교수직을 역임하였으며 16세기와 17세기 신학적 해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학자이다. 그의 아내는 석연치않은 이유로 자살을 하였고 그 후로 자신의 아이를 직접 양육하겠다며 9년간 실험을 한 것이다. 그의 실험은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새로운 언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 새로운 언어야 말로 인류를 구원할 언어라는 것이다.

퀸은 스틸먼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의 논문을 조사하고, 그가 정신 병원에서 나온 후에도 우연을 가장한 접촉을 하며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 스틸먼은 목사 헨리 다크의 소책자 <새로운 바벨탑>에서 영감을 받아 하나의 이론을 세우는데, 최초의 바벨탑은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고 그 주인이 되어라> 라는 계명에 반하였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샀는데, 당시에는 신대륙이 발견되지 않아서 아직 땅을 모두 채우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대륙이 발견되고 모든 땅을 인류가 채운 지금, 바벨탑을 세우고 하나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헨리 다크는 스틸먼이 창조한 가공의 인물임이 밝혀지는데 헨리 다크는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달걀, 험프티 덤프티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아직 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재적인 존재이며 어느 누구도 일으켜 세우지 못하였던 존재이다. 그런데 다른 또 하나의 달걀, 즉 콜롬버스의 달걀은 세워진 달걀인데 신대륙이 발견된 것과 같이 이제 달걀이 세워질 때가 되었다는 논리이다. 

퀸은 스틸먼을 계속 뒤쫓는 과정에서 그의 산책로가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고, 그 글자를 조합하면 <THE TOWER OF BABEL>이 되는 것을 알고 더욱 긴장을 한다. 그 글자를 마치는 때에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날, 그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사건을 의뢰하였던 피터 스틸먼과 그의 부인 버지니아 스틸먼 역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탐정 폴 오스터를 찾아가지만 그 역시 탐정이 아닌 작가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애초에 자신이 의뢰된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맥스 워크와 자신의 동일시에 있었음을 기억하고 스틸먼 부부의 집을 감시하며 피터 스틸먼의 공격에 대비하기로 한다. 몇 달이 지나도록 그는 집을 감시하지만 피터 스틸먼은 나타나지 않는다. 돈이 떨어져 폴 오스터 앞으로 발행된 수표를 기억하고 그에게 전화를 하는데, 폴 오스터는 피터 스틸먼이 이미 자살했다고 말한다. 할 수 없이 몇 달만에 집으로 돌아가지만 자신의 집은 이미 치워지고 다른 세입자가 살고 있으며 스틸먼 부부의 집으로 가보니 그 집은 텅 빈 집이다. 그곳에서 그는 먹는 시간 외에는 빨간 공책에 농아 단체가 판매한 볼펜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 외에는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빨간 공책에 더 이상 쓸 자리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이다.

 

o 폴 오스터와 퀸의 만남에서 등장한 <돈키호테>에 관한 이야기

폴 오스터는 <돈키호테>에서 중요한 점은 세르반테스 자신이 저자가 아니며 아메테 베넨겔리라는 아랍인이 실제 저자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세르반테스는 이 아랍어 원고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였을 뿐이고 원고의 편집자일 뿐이라는 밝히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아메테 베넨겔리가 네 사람의 복합체이며 돈키호테를 계속 따라다니며 모든 사건을 지켜보는 산초가 이발사와 사제에게 구술하여 주며, 수습 기사인 삼손 카라스크가 스페인어를 아랍어로 번역하고 세르반테스가 다시 아랍어를 스페인어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미친짓을 사람들이 얼마나 참아낼까 시험하고 그 시험 결과 사람들은 얼마든지 참는다는 것을 알아냈고, 산초 등은 돈키호테의 광기를 치료하기 위해 돈키호테의 책들을 불태우고 갖가지 변장을 하여 돈키호테의 행동을 거울로 비추듯 보여준다는 것이다.

 

<유령들>

화이트는 탐정 블루에게 블랙을 감시해달라고 사건을 의뢰한다. 블루는 화이트의 부인과 블랙이 모종의 불륜관계에 있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 실제 어떤 이유 때문에 감시를 부탁한 것인지는 모른다. 블랙의 아파트 건너편에 자리를 잡은 블루는 블랙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블랙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거나, 몇 시간 동안이나 글을 쓰거나 할 뿐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어느날 집을 나선 블랙이 어떤 여자와 식당에서 만나는데 블랙과 그 여자 모두가 슬픔에 잠겨 흐느끼지만 여자를 택시에 태워 보낸 블랙은 집으로 향하고 그 외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블랙은 블루를 계속 감시하면서 그가 읽는 책을 사서 읽기도 하는데 점점 블랙이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생각을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느날 길거리에서 애인이 다른 남자와 길을 걷다가 자신과 마주치는데 그 여자는 분노로 블루에게 화를 내고, 블루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 여성을 방치하였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생각한다.

화이트에게 계속해서 보고서를 보내면서 블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고, 블랙의 행동에서 어떤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도 없었기에 자신이 보고서를 보내는 사서함이 있는 우체국으로 화이트를 찾으러 간다. 그러나 화이트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나타나 편지를 가지고 사라져버리고, 그 후로는 화이트를 우체국에서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블루는 그 후 블랙과 직접 접촉을 시도하고 난 후 거짓 보고를 보내자 화이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음번 만남에서 블랙은 자신이 사설 탐정이며 누군가를 감시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블루는 블랙이 하는 일이 블루가 하는 일과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안다. 블루는 블랙의 집을 변장하여 다시 방문하는데 이번에는 블랙이 자신의 직업을 작가라고 말한다. 마지막 방문에서 블루는 블랙의 집에서 화이트가 쓰고 있던 가면과 똑같은 것을 발견하고, 블랙은 '내가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을 나 자신에게 떠올려 주기 위해 자신을 감시하는 블루의 존재가 필요했다'며 블랙과 화이트가 동일한 인물임을 밝힌다. 권총으로 위협하던 블랙을 블루가 제압하고 그를 마구 폭행한 후 블랙이 쓴 원고를 집으로 가지고 가서 읽고 나서 모자를 쓰고 방 밖으로 걸어나간다.

 

<잠겨 있는 방>

어느날 어릴 적 친구인 팬쇼의 부인 소피로 부터 편지가 온다. 소피는 팬쇼가 행방불명이고 아마 죽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가 지금까지 써온 원고의 처분을 나에게 위임할 것을 팬쇼가 말했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팬쇼를 동경과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는 그의 원고들이 무척 탁월한 작품임을 알게된다. 작품을 발표하자 문단에서는 찬사가 쏟아지고 나와 소피는 막대한 인세 수입을 얻게 된다. 소피와 사랑에 빠진 나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날 죽었다고 믿고 있던 팬쇼로부터 한장의 편지를 받는데, 거기에는 소피와 아이를 보살펴주어 감사를 표하는 한편, 자신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고 작품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지만 자기를 절대로 찾지 말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팬쇼가 살아있음을 소피에게 얘기할 용기를 내지 못한채 소피와 결혼하고 벤을 입양하고 팬쇼의 작품을 발표해가던 어느날 그에게 편집자가 팬쇼의 전기를 써볼 것을 권유하고 '나'는 이를 수락한다. 팬쇼의 행적을 따라가며 자료를 조사하는 도중, '나'는 팬쇼의 전기를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팬쇼를 찾아내기 위한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팬쇼가 사실은 '나'의 필명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팬쇼 어머니가 '나'와 팬쇼가 너무 닮아서 어릴 적 종종 구분이 되지 않았다는 말들을 듣자 더욱 팬쇼를 찾는데 몰두하게 되고, 어느날 팬쇼의 어머니가 '나'를 유혹하자 그녀와 성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그 행위의 의미가 그녀를 이용해 팬쇼를 공격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리고, 팬쇼를 찾아내 죽이고 싶다고 느낀다.

그 뒤로 소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파국에 이를 지경이 되고 '나'는 팬쇼의 전기를 쓰는 일이나, 팬쇼를 찾는 일을 계속하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며 집으로 돌아오고, 팬쇼로부터 두번째 편지가 도착한다. 다시 만난 팬쇼는 그동안에 살아왔던 일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 빨간 공책에 적혀 있다고 말하며 '나'에게 건내주고, 나는 공책에 적힌 것을 모두 읽고 난 후 쓰레기통에 버린다.

 

<뉴욕 3부작>은 세 작품은 서로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모두 읽고 난 후에야 각각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각각의 작품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유리의 도시>  : 퀸, 피터 스틸먼, 피터 스틸먼(아버지), 버지니아 스틸먼, 폴 오스터

<유령들> : 블랙, 화이트, 블루

<잠겨있는 방> : 나, 팬쇼, 소피, 피터 스틸먼, 퀸

 

두 가지 이야기를 보자. 먼저 <잠겨있는 방>의 '나'가 술집에서 팬쇼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을 걸지만 그가 자신의 이름은 피터 스틸먼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팬쇼가 마지막 만남에서 '나'에게 한동안 자신이 퀸에게 추적을 받았다고 하는데, 소피는 퀸이 5주정도 찾아보다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팬쇼는 퀸이 자신을 찾아내었으며 한동안 도망다녔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퀸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말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 팬쇼가 도망친 후 퀸은 팬쇼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팬쇼는 피터 스틸먼이라는 이름으로 가공의 피터 스틸먼을 만들어내어 살해 위협에 처해있다며 사건을 의뢰한다. 가공의 피터 스틸먼(실제로는 피터스틸먼 자신의 변장, 혹은 팬쇼)을 퀸이 쫓아다니는 동안 팬쇼는 사라지고 퀸은 마지막에 자신이 왜 1969년에 스틸먼이 체포되었을 당시의 신문 기사를 찾아보려 하지 않았었는지 의문을 갖는다. 즉, 1969년에 스틸먼의 체포 기사는 없었을 것이고, 그가 찾아다니던 피터 스틸먼은 허구의 인물임을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 아닐까? <잠겨있는 방>에서 '나'가 팬쇼를 발견하지만 팬쇼라고 지목된 사람은 자신의 이름은 피터 스틸먼이라고 하면서 도망치는 장면도 이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리의 도시>에서 퀸이 방문한 폴 오스터가 사실은 <잠겨있는 방>의 나는 아닐까? 팬쇼가 사라지고 소피와 결혼한 시기쯤으로 보면 적당할 것 같고, 폴 오스터가 쓰고 있는 작품들과 <잠겨있는 방>에서 '나'가 쓰고 있는 글들도 비슷하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짝짓기를 애써 부정하는 듯 아내의 이름은 시리, 아들의 이름은 대니얼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는 아이의 이름이 대니얼이라고 밝힌 후 아이가 "모두가 다 대니얼이네"라고 하자, 퀸이  "그렇구나, 나는 너고 너는 나고"라는 말을 함으로서 언어가 지칭하는 것이 반드시 그 사물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한다.

다음으로 <유령들>에서 블랙과 화이트는 동일 인물이다. 화이트는 자신을 감시해 달라며 블루에게 사건을 의뢰하고 보고서를 받는데, 그 보고서를 통해 타인의 눈으로 자신(블랙)을 바라본다. 그리고 타인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화이트(블랙)이 팬쇼이고, 블루가 퀸이라면 어떤가? 그러나 작가 자신이 이러한 명확한 가정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블랙,화이트,블루로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든 일반적인 추리소설처럼 딱 들어맞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작품 전체에서 이름에 관한 불확실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가정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얼마든지 부정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토록 복잡한 상황을 만들고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일까? 작품을 읽다보면 일반적인 추리소설처럼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실마리도 있지만 사건이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으며, 어느사이엔가 '글을 쓰는 사람의 딜레마'로 회귀한다. 

<유리의 도시>에서 폴 오스터가 말한 <돈키호테>에 관한 해석을 보자. 자신이 작품을 썼으면서도 자신은 원작자가 아니며 번역본의 원고 편집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스스로 검열을 통해 제3의 인물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지만 온전히 거기에 몰두할 수가 없다. 작가에게는 독자가 필요하며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의 부모, 심지어 나 자신도 될 수가 있기에 그들을 의식하다 보면 끊임없이 제3의 인물의 이름으로 작품을 쓰고 싶은 유혹이 일 것이다. 퀸이 윌리엄 윌슨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그 작품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퀸이 일거리를 맡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윌리엄 윌슨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유령들>에서는 작가인 화이트가 '내가 하고자 한 일을 타인이 떠올려 주길 바라면서' 감시역 블루를 고용한다. 그리고 원고를 가져가는 것도 스스로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블루와의 폭력적인 결말 끝에 블루가 탈취해가는 형태이다.

<잠겨있는 방>에서 팬쇼는 자기의 작품을 스스로 발표하지 못하고 가정을 버리고 증발해 버림으로서 발표 이후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친다. 팬쇼는 자신의 작품들이 발표될 줄도 몰랐고 모조리 쓰레기라고 생각했다면서 추후 작품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팬쇼는 권리를 주장하여 막대한 인세수입을 얻는 것보다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들에 책임을 지는 일이 더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또 마찬가지의 이유로 공책과 원고들은 읽히고 난 뒤 사라지거나 내용이 불분명하다. 공책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고(유리의 도시), 원고를 가지고 나간 후의 일을 알 수가 없거나(유령들), 원고를 찢어서 버리거나(잠겨있는 방) 하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29813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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