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섬 안의 튼튼한 요새에 국왕 암살 음모에 가담한 죄로 네 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다. 다음 날 단두대에서 처형되기로 예정된 그들에게 콘살보 데 리티스 사령관이 하나의 제안을 한다. 네 명중 한명이라도 '불멸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배후 인물을 밀고하면 네 명 모두를 살려주겠지만, 모두가 밀고하기를 거부한다면 예정대로 처형하겠다는 것이다. 나 자신은 X표를 적어넣어 신념을 지키더라도 누군가 한 명만이라도 배신한다면 삶은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이미 신념을 배신하는 것이다. 모두가 X표를 적어 넣는다면 죽음을 맞게 될 것이고, 신념을 지키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자신들의 신념이 죽음을 넘어설 만큼 확고부동해야 한다. 사람이 한 일에 일말의 의심도 없을 수 있을 것인가? 교묘한 제안을 남겨둔 채 사령관은 방을 떠난다.

처형되기 전날 밤에 머무는 위안실로 이송된 그들에게 먼저 방에 와 있던 산적 치릴로가 <데카메론>에서 처럼 서로의 얘기를 하며 밤을 보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한다.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면, 많은 걸 극기한 끝에 맞이한 이 종말이 과연 바람직한 결말인지, 아니면 느닷없이 틀린 음적이 들어가 가락이 맞지 않게 된 건 아닌지 이해하게 되겠지..."

 

o 나르시스 루치로라(학생) : 포악하고 혈기왕성한 아버지는 부유한 포목상이었으며 외국에 나갈때마다 새로운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누나 올림피아와 주로 시간을 보낸다. 정원사인 가스파레로부터 오보에와 호른을 배운 그는 가스파레를 흠모한다. 어느날 가스파레를 누나 올림피아가 유혹하다가 후견인이 발견하자 올림피아는 가스파레가 추행을 저지른 것이라 덮어씌우는 사건을 벌인다. 이에 나르시스는 가스파레와 더불어 집을 뛰쳐나온다. 어느날 우연히 에우니체라는 여인에게 반하는데 그녀의 남편은 베니에로 마닌이라는 자로 반역죄로 감옥에 갖힌 처지이다. 베니에로 마닌을 탈옥시켜 에우니체와 도망을 치지만 우연히 만난 사냥꾼들이 수상히 여기자 마닌은 나르시스가 바로 그들이 찾고있는 탈옥범이라고 덮어씌운다. 왕국 감옥으로 압송되던 그를 혁명세력이 습격하여 그는 달아나고 그 혁명세력 사이에 있떤 에우니체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가 단두대에서 기억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그날 밤의 이야기이다.

 

o 콜라도 인가푸(남작) : 혁명가인 쌍둥이 동생 세콘디노가 프랑스로 도피한 후 남작은 여행 중 동생을 만나게 된다. 체스 게임 중 시비가 붙어 왕당파인 피브라크와 세콘디노는 폭풍우가 치던 날 결투를 벌이고 동생은 죽게된다. 동생의 죽음과 유서에 쓰인 '형이 가진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내 일을 상속받아 내가 못 다한 것을 형이 해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에 그는 동생이 걸었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무서워한다.

 

o 아제실라오 델리 인체르티(군인) : 유랑극단의 배우였던 어머니는 군인에게 강간 당해 자신을 임신하고 역마차 주막 탁자 위에서 태어난다. 수도원에서 자라던 그에게 아라비토 신부는 어머니의 유물이라며 청금석 손잡이가 달린 톨레도 단검 등을 전해준다. 단검에서 빼낸 쪽지에는 "단검의 주인을 찾아라. 그러면 넌 네 아버지를 찾은 거란다. 네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라."라는 유언이 적혀 있다. 아버지를 찾아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간 그는 우연히 아버지를 찾아내게 되고 그를 살해한 후 체포된다.

 

o 살림베니(시인) : 민중이 아닌 귀족을 주로 선동하던 그는 마니아체 공작의 집으로 향한다. 여행 도중 머리를 다친 그는 이미 사망한 마니아체 공작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 집에는 공작부인과 부인의 의붓아들인 아마빌레가 살고 있다. 공작부인과 아마빌레 모두가 살림베니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만 그는 그 집을 떠나게 된다. 떠나는 그를 배웅하던 중 미망인은 잃어버린 반지를 찾아오라며 의붓아들을 되돌려 보내고 둘은 오두막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산적 살리바가 그를 묶어두고 미망인을 강간한다. 살림베니는 반지가 미망인의 목걸이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미망인이 자신을 유혹했음을 알게 된다. 잠시 뒤 오두막에 들어온 아마빌레는 그 광경을 보고 자살한다. (이 이야기에 대하여 치릴로 수도사는 살리바라는 산적은 시인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며, 실제 정사를 벌인 것은 살림베니 자신일 것이라 지적하자 살림베니는 대단한 통찰력이라고 말한다)

 

네 명의 이야기는 제각각 혁명가로서 죽음을 앞둔 이의 이야기 치고는 세속적이기만 하다. 나르시스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하며 살고 싶다고 외치는 나약한 모습이고, 남작은 혁명적인 활동을 한 것이 동생의 죽음과 자신의 정신적인 공허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아제실라오 역시 고위장교를 죽인 것이 혁명적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한 것에 불과하였던 것이며, 살림베니는 공작부인과 정사를 벌이고 그 의붓아들을 죽음에 빠지게 만든 파렴치한이다.

그들은 얘기를 마친 후 '불의의 신'이 자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을 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가 궁에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다. 왕이 아니면 왕의 동생에게 작별을 고하고 오면 되지 않느냐는 치릴로의 말에, 어떻게 불멸의 신이 스스로에게 작별을 고하겠느냐는 말 실수로 불멸의 신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왕의 동생이었음이 밝혀진다. 이때 치릴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알아야 할 것을 알았다고 외친다. 침대에 누워있던 치릴로의 정체는 사령관 콘살보였던 것이다. 그는 네 명에게 제각각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 그들의 신념을 흔들리게 만들고 그 와중에 '불멸의 신'의 정체가 밝혀지도록 연극을 꾸민 것이다. 그들 네 사람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사령관 콘살보에게 속아 넘어가 신념이 흔들리고 결국 '불멸의 신'이 누구인가 발설하는 실수를 한 것일까? 콘살보는 오히려 그들 네 명에게 속아넘어간 것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음이 밝혀지는데, 사후 조사를 통해 남작의 경우 죽은 것이 아우가 아니라 형 쪽이며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밝혀진다. 나르시스는 올림피아 누나를 여러 차례 유혹했기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것이며 아제실라오는 치졸한 싸움을 벌이다 상관을 살해했을 뿐이다. 살림베니의 이야기는 이미 콘살보가 그날 밤 거짓말을 하였다고 밝혀냈다. 그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지어내어 콘살보(치릴로)를 속여 '불멸의 신'이 왕의 동생임을 끊임없이 암시하고, 결국 유일한 왕위 계승자를 반역자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삶과 죽음, 의지와 나약함, 진실과 거짓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소설의 결말을 읽고 나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상 스트레가 상 수상작으로 스트레가 상 후보자 전원이 "이렇게 훌륭한 작품과 경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라며 사퇴를 하였다고 한다.

 

책 말미에 시칠리아 카타리나 대학의 교수인 눈지오 자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경이 다른 네 이야기는 한 가지 주제로 모이고 그것을 축으로 하여 돌아간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에 대한 불안한 추구이다. 억압되고 분열된, 혼란스럽고 당황스런, 독창적인 개성이 있는 이야기들은 자유주의 혁명을 대의 명분으로 하면서 개인의 어둡고 지울 수 없는 충동의 파동 위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영역에서 무의식의 헤아릴 수 없는 영역으로 쉽게 넘어가는 동기들의 파동 위에서 긍정적인 출구를 찾는다."

 

네 명의 이야기는 그들이 지어낸 얘기와 실제 얘기 모두가 어찌보면 혁명적 대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나약하고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그들 넷은 혹독한 고문에도 배후를 대지 않았으며(어쩌면 배후는 원래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유일한 왕위 계승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후 처형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마르크스의 가정사야 워낙에 잘 알려진 일이고 엥겔스의 취미는 고급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었다고 한다. 레닌의 죽음이 매독 때문이었다며 그의 사상 역시 매독과 다르지 않다는 식의 기사도 언젠가 얼핏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한 저열한 인식에 대한 해답을 어쩌면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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