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하면서도 그의 소설을 가끔씩 서점에서 사다가 읽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은 후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해결된 듯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겠지만, <스푸트니크의 연인>이야 말로 가장 무라카미 하루키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그런 이유로 앞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속임수를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화자인 나와 스미레, 그리고 뮤이다.
먼저 '나'를 보자. 무라카미 소설의 여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나'는 귀찮은게 싫으므로 주어진 예습 복습을 마지 못해 하였으며, 그런 결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있다. 본인은 너무나 평범하다고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으나 그의 누나는 변호사이며, 그의 부모도 중산층 이상의 유복한 계층이다. 특별하달 것 없는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도 알 수 없는 성적 매력이 있는지 여러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역시나 쿨한 성격인지라 그런 여자들과 깊은 관계에 빠져들 수가 없다.
스미레 역시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아버지는 치과의사이며, 새어머니는 신기하게도 스미레에게 단 한차례의 구박도 하지 않는다. 학교를 다니지만 주변 인물들과 동화할 수 없어(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수준이 맞지 않아서) 자퇴를 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뮤라는 여자는 더욱 더 가관이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일본에서 자랐으며 어렸을 적부터 유럽 쪽에서 음악 유학을 한다.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에 단 한차례도 차별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그의 아버지는 무역을 꽤나 크게 하고 있으며, 한국의 북쪽 마을 태생인데 많은 돈을 그 마을에 기부한 덕분에 '동상'을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세워주었다고 한다!
한국의 북쪽이라 해도 북한에서 김일성 이외의 인물 동상이 세워질 리는 없으므로, 남한이란 얘기인데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낸다. ('한국인들은 고양이를 먹는다는데...' 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렇듯 각 등장인물의 인생사 자체가 무척이나 부유하며 그들의 인생살이에 고달픈 삶의 애환 따위는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 이들이 만나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더욱 더 가관이다. 뮤는 스미레를 보더니 단박에 얼굴만 봐도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으니 내일부터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라는 제의를 한다. 알고보니 스미레는 대학 중퇴를 했지만 스페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탈리아어 강습을 받는게 좋겠다는 뮤의 말에 기껏 두어달 강습을 받았지만 이탈리아 여행에서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취업이라는 것 자체가 인생에 있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각박한 현실 따윈 전혀 없이, 그저 얼굴 한 번 대면한 후 바로 채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더니 둘은 영혼의 어떤 공통분모를 느낀 것인지 어쩐 것인지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되며(말은 사업상이지만 실제는 여행이다) 그 비용 일체도 뮤가 대준다.
그러던 중 스미레가 그리스의 한 섬에서 사라지자, 주인공인 '나'는 그리스로 떠나게 되는데 놀랍게도 주인공 역시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있으며 아무런 의사소통에 장애를 겪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 그야말로 그대로 드러나는 바, 특징을 대충 거칠게 나마 정리해보면
1. 중산층 이상, 혹은 최상류층의 등장인물. 단 주인공은 중산층에 한정하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야 할 때도 본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아르바이트를 해나간다.(심지어 잔디를 깎더라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속도와 방식으로)
2. 그들은 모두 독서와 음악의 애호가이며, 독서는 최근 작가는 제외하고 음악은 재즈와 클레식, 70년대의 록음악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3. 그들은 진정한 의사소통에 장애를 겪는 경우가 다반사인바, 이는 현실의 문제로 인한 장애가 아닌 형이상학적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그들의 장애가 해소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4. 등장인물들은 편견과 지역적 한계로부터 자유롭기에 동성애등 당시의 이슈에 대해 너그러우며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는 경우는 없다.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세계시민으로서의 면모에 걸맞게 영어, 스페인어 등 각국의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기본적 전제를 바탕으로 그들은 이미지의 화신이 된다. 실체 없는 이미지는 마약과 같다. 프랑스요리를 먹으며,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와인의 맛을 알며, 재즈와 클레식을 사랑하는 주인공은 경제적 어려움마저 없다. 그들은 고독한 존재들이다. 고독한 존재들의 연애는 쿨하다.
줄거리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같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실에 없는 그 이미지들이 때로 그립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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