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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 ㅣ 나남창작선 114
안정효 지음 / 열음사 / 199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안정효 소설은 재미있다. '하얀전쟁' 과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등 그의 대표작들이 모두 영화화 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안정효 소설의 공통점이라면, 주인공들이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며 그 혼란의 원인이 대게 외부로부터 오며,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간 제3세계 시민의 혼란,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허구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주인공 등 그들이 겪는 삶의 질곡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노력을 통해서는 해소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미늘의 주인공인 서구찬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렸을 적 양자가 되며, 성악가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은 있었지만 배다른 형제들끼리의 유산싸움 와중에 백화점 하나를 양도 받아 경영자가 된다. 헐리우드키드의 생애의 주인공처럼,막연한 배우자의 '이상향'에 집착한 나머지 현재의 부인에게 알 수 없는 불만만을 갖고 현실에서 도피를 반복하던 그에게 수미라는 여자가 먼저 접근해오고 어정쩡한 불륜관계를 지속하나 결국 스스로 그 끈을 끊어내지는 못한다.
미국인아버지의 주인공 역시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처가집에 휘둘려 미국이민을 가게 되나, 부인은 바람을 피우고 딸은 쾌락을 자유와 혼동하며 아버지, 혹은 한국과는 전혀 무관한 국적불명의 'Amerisian' 이 된다는 내용이다.
황야에서는 진보적 성향의 희극을 썼다는 이유로 타국으로 쫓기듯 도망가 결국 가족마저 해체되는 신산한 풍경을, 마지막으로 혼선은 어느날부터 전화기가 혼선되어 우연히 타인의 삶을 엿보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결국 안정효 소설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외부로부터의 변화와 영향-특히나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의-으로 인해서 그들 정체성이 규정되고, 어느 순간 그 정체성에 의문을 품고 해결해 보려 노력하지만 그 결말은 자살이나 폭력, 좌절로 마무리된다.
결국 흉내낸 삶, 규정된 삶의 부조리의 파국은 쓸쓸하기만 하다.
잭 런던의 '마틴 에덴'에서 마틴 에덴이 자신을 온전히 개조하여 전혀 새로운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나, 결국은 바다로 뛰어드는, 허구의 인생 이야기가 안정효 소설에서도 그대로 적용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소위 '건강한' 소설은 아니다. 해결책도 없고 절망만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카프카의 '성' 처럼 알 수 없는 답답함에 결말까지 보고난 이후에도 찝찝한 뒷맛을 남기지는 않는다. 아마도 코리아헤럴드 기자 시절을 거쳐 백마부대에 소속되어 베트남전에 참전한 그의 전력이 소설이 형이상학으로 치닫는 것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의 소설은 일단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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