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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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를 찍고 난 뒤 버려진 강 기슭 세트장에 사람들이 모여 산다. '가족'으로부터 상처받고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들은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서로를 긍정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새미가 마을 밖으로 나갔다가 조폭들의 눈길을 받는다. 성욕에 눈이 먼 조폭 하나가 새미를 뒤쫓고, 새미의 동생 준호가 조폭의 눈을 나뭇가지로 찔러 실명케 한다.

눈이 뒤집힌 조폭들이 떼를 지어 마을로 처들어올 기미를 보이자 가장 연장자인 영필은 새미를 마을 밖으로 내보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가족이 뭐냐?는 여산의 물음에 영필은 마음을 고쳐 먹는다. 이제 버려진 세트장에서 <7인의 사무라이>를 찍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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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발표된 소설로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실대는 강 밖의 세계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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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약한 고리를 솎아내고, 그들을 '배제된 자'로 만듦으로써, 전체의 안위를 구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약자들을 대변하는 것이라 호도하는 방식(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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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반나치 투쟁을 이끈 루터교 목사 마르틴 니묄러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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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사회주의자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 조합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 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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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에 대해 생각했다. 핏줄로 이어진 것이 뭐라고 우리들은 그 사슬에 묶여 상처 받고, '말리는 시누이'의 궤변을 듣고, '자기 마음 편하자는 구성원'에 의해 화해를 강요 받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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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 '가족'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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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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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단어는 핏줄로 이어진, 그것이 반쪽이든 반의 반쪽이든 혈연으로 연결된 구성원의 집합을 총칭하는 말이다.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으면 법적으로라도 구속되어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사전적 의미의 가족은 유산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 지를 법적으로 정해놓은 관계 같다. 혈연을 우선으로 유산을 배분하되, 법적으로 가족이면 거기까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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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본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소나티네>를 보면 야쿠자 두목 무라카와와 똘마니들이 해변가에 몸을 숨기고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걸 잊고 웃고 떠들며 천진하게 지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공동체나 가족의 이미지를 보았다. 물론 그 가족은 오래가지 못한다. 뿌듯한 공동체의 충일감은 대량 사살과 자살로 끝이 난다.

<소나티네>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것이 틀림 없어 보이는 <달마야 놀자> 역시 재밌게 봤지만 끝내 <소나티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결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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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파탄에 이르렀고, 그 파탄의 주요한 원인으로 가장이 지목되며, 그로 인해 가족 안의 가장 약한 구성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남는다는 사실, 나아가 그 구성원들이 그들을 옭아맨 사슬로부터 자살적인 탈주를 감행한다는 사실은 외면하기 힘든 사회 심리적인 상징이다.(247p)

군림하고 제압하는 '부권'이 아니라 인정하고 보살피는 '부성'이 필요한(251p) 신자유주의 시대에 공동체와 생태주의의 해법을 제시한 성석제의 <위풍당당>은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438759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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