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 정진영 소설집
정진영 지음 / 무블출판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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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박지수는 어렸을 적, 아내를 잃은 뒤 피리를 부는 동네 할아버지로 부터'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적들을 물러가게 하고, 백성들의 병이 낫게 만들며, 가물 때는 비가 오게 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치게 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준다는 전설의 피리 이야기. 지수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수는 어머니께 만파식적 이야기가 실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사달라고 하여 읽는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긴 하지만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는 짧고 무미건조한 내용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실망한 지수는 헌책방 주인에게 이를 따져 물었고, 헌책방 주인은 지수에게 <삼국사기>는 역사를 기록한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설명과 함께 <삼국유사>를 선물한다. 그날 저녁 지수는 <삼국유사>를 읽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았고, 후에 사학과에 진학하는 계기가 된다.

대학에 진학해서 지수는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또 다른 박지수와 사귀게 된다. 7년을 사귀었다. 그러나 둘은 이어지지 못했다. 또 다른 지수는 선을 봐서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친구 동호가 전화를 걸어와 '지수가 간암에 걸려 죽었다'고 말했다.

향을 사르고 절을 한 뒤 상주와 맞절을 했다. 상주는 지수를 안다고 했다. 현주는 지수가 '마지막에 네 이름만 부르더라'고 했다. 아마 그래서 아는 것 같았다.

술잔을 비우면서 한국사 전공수업 시간에 들었던 처용무 이야기를 떠올린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처용은 왜 역신疫神과 관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노래하며 춤까지 추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교수는 아내의 문란한 행실에 의연히 대처하는 남편의 이야기가 천년을 이어갈 생명력을 가졌을 리 없다며 자신의 해석을 들려준다. 아내와 역신이 몰래 잠자리를 했다는 표현은 아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의미이며,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처용이 깨달았을 때 미치지 않기 위해 춤이라도 추었어야 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지수는 술이 올라 꼬부라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갑자기 별이 보인다 싶더니 바닥이 덤벼들었다. 지수의 남편이 주먹을 날린 것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지수와 지수의 남편, 처용과 역신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이 역신인지 처용인지 잘 모르겠다고 낄낄댔다. 둘은 어깨동무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높아진 노랫소리에 흐느적거리는 춤사위가 어우러졌다.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는 잘 쓴 소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대비시켜 역사와 이야기의 경계를 만들고, 둘 사이의 긴장을 소설에 녹여내는 수법이 꽤나 멋지다.

처용무를 인용한 부분도 그럴싸하다.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이야기가 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현실과 이야기에 시간이 쌓여 역사가 된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구멍과 헛점이 있다. 언제나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내가 처용인지, 역신인지 알 수 없게'되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처용무를 다르게 해석한다. 처용이 돌아와보니 아내가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있다.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간장이 끊어지는 이 아픔을 이겨낼 것인가.

아내가 자의로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면, 저 사내가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라면, 그런 경우라면 겨우겨우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처용은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 것 아닐까. 역신이야 말로 내가 어쩔 수 없는 존재다. 지금 아내와 관계하고 있는 저 남자는 역신이다.

이렇게 현실을 부정하고 춤을 추는 것, 그것이 애이불비愛而不悲에 더 가깝지 않을까?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외에는 그다지 마음 가는 작품이 없다. 같은 작가가 쓴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준이 한참 못 미친다.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만 '원 히트 원더' 느낌이랄까.

아울러 작가의 역사 인식과 세계사에 대한 통찰력도 단선적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일본문제에 대한 인식 등이 다소 편협하고, 정치권 문제에 대해서는 발만 들여놓을 뿐 자신의 생각은 얼버무리는 비겁함도 엿보인다. 소설가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명재일', '석윤열' 까지 등장인물로 끌어들인 마당에 얼버무리는 건 왜일까. 커밍아웃 타이밍을 재는 느낌도 얼핏 든다.

작품집에는 재난지원금으로 홍삼세트를 사서 어머니와의 소박한 식사를 꿈꾸는 <선물>, 당근마켓에서 목업폰 사기를 당한 뒤 마찬가지로 당근마켓을 통해 사연있는 남자로부터 위로를 받는 <징검다리>, 학폭과 사실적시명예훼손 문제를 다룬 <네버 엔딩 스토리>, 주거 문제와 소시민의 심리를 다룬 <숨바꼭질>, 2042년 미래에 자신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시간을 되돌리면>, 깐따삐야에서 온 도우너가 지구인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눈 먼 자들의 우주>, 환웅과 웅녀 이야기를 모티브로 쓰여진 <사랑의 유통기한>, 도시개발과 부동산 문제를 다룬 <동상이몽>, 콜센터 노동자를 소재로 한 <안부>, 동호회에서 여성회원의 태도를 오해해 김칫국을 마시는 <동호회>, 큰외삼촌의 첫사랑 이야기를 다룬 <첫사랑>이 함께 실려 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7700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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