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원 (외)
김구 지음 / 범우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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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구는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어렸을 적 국문, 한문을 수학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낙방한 뒤 풍수, 관상, 병법을 배웠고, 동학도에 입교한 뒤 접주가 되어 의병운동을 펼쳤다.

스무살에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밀정 쓰치다 조료를 살해하여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진 뒤 탈옥하여 방랑하다 마곡사 중이 된다.

이듬 해인 1899년 환속한 그는 약혼자의 죽음과 파혼을 거친 뒤 1904년 결혼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신민회를 통한 구국운동과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

1909년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석방 되었고, 1911년에는 데라우치 총독 살해 사건에 연루되어 17년 형을 언도 받는다. 이 시기에 이름을 九로 고치고, 호를 白凡이라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 요직을 거쳤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으며, 이봉창, 윤봉길의 거사에 관여 하였다.

장개석 정부와 관계 하였으며,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 하고 미국 원조 하에 본토 상륙 작전을 추진하였다. 이승만 등과 반탁운동을 벌였고, 남북이 갈리는 것을 막기 위해 진력하다 1949년 경교장 앞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사망한다.

<나의 소원>은 1947년, 해방 이후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 38선이 그어지고 남북이 갈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발표된 글이다.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우파 민족주의자의 카랑카랑한 일성이다. 이어 김구는 말한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이 정도면 그의 민족주의적 신념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될 지경이다. 그에게 있어 민족이야 말로 유일무이한 선이요, 진리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가 필연적으로 갖게 될 배타성이라는 한계를 우려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최근 김구의 이러한 비전에 대하여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 라는 밈이 유행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일본 문화 개방을 앞두고 '일본의 문화 식민지가 될 것'이라며 우려하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던 나로서는 경천동지할 만한 상황이다.

비록 해방시기 혼란 정국, 민족주의에 경도된 나머지 '일본제국주의-미제국주의'로 이어지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그 결과 김구는 여수 순천 10.19. 사건과 제주 4.3.사건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해 중립을 표방한다), 이승만과 연대하여 객관적 조건을 떠난 반탁 운동에 골몰한 점, 김두한과 같은 정치 깡패의 테러에 대해 '이해할 만 하다'고 언급한 점 등 그의 민족주의 사상에 한계는 분명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쪽같은 민족·보수주의자로서의 행보들은 진실성과 진정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동학농민운동부터 항일운동과 대일전쟁선포국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한치의 사념도 없었다는 점에서, 존경할 만한 우파 보수주의 인사다.

개인의 영달과 안녕만을 위해 신념이나 사상도 없이 그때 그때 이득이 되는 말만 주워 섬기며 더러운 요설을 뱉어내는 자칭 '보수', 타칭 '친일매 국토착왜구' 들과는 일말의 공통점도 없다 하겠다.

주요 연보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출생. 아명은 창암(昌巖)

1884년 국문과 한문 수학

1889년 <통감 通鑑>, <사략 史略> 등 병서 읽음

1890년 <당시 唐詩>, <대학 大學>, <과문 科文> 배움

1892년 과거 낙방, 풍수, 관상, 병서 탐독. 동학 입도 후 창수(昌洙)로 개명

1893년 최시형 만남

1894년 팔봉접주로 해주성 공략, 실패

1895년 소년 안중근 만남. 

            해서의 성리학자 고능선(高能善) 지도 받음

김이언이 지휘하는 의병대 참가

1896년 일본 간첩 쓰치다 조료(土田壤亮) 살해. 명분은 명성황후 시해의 복수

1897년 사형 확정. 고종 특명으로 특사령 내려짐

1898년 탈옥 후 방랑 하다 공주 마곡사 중이 됨

1899년 환속

1901년 엄친 김순영 사망

1902년 여옥(如玉)과 약혼

1903년 여옥 사망 후 기독교 입교. 안창호 영매 신호와 약혼, 그러나 파혼

1904년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결혼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06년 해서교육회 총감. 학교 설립 추진

1908년 신민회를 통한 구국운동. 양산학교 세움

1909년 재령 보강학교 교장. 10월 안중근 의사사건 연좌, 해주감옥 투옥 후 석방

1910년 신민회 비밀회의 참석

1911년 1월 5일 데라우치 총독 암살하려한 안명근 사건 관련 체포, 17년형 언도

1913년 옥중에서 이름을 九, 호를 白凡이라 함

1914년 감형으로 7년 형기 끝내고 7월 가출옥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 망명 후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1923년 임시정부 내무국장

1924년 부인 최준례 사망

1926년 임시정부 원수인 국무령 취임

1927년 헌법 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위원 취임

1928년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3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29년 <백범일지> 탈고. 재중(在中) 거류민단장 겸임

1931년 한인애국단 조직, 단장 취임 후 독립투사 양성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일황 저격 실패. 4월 29일 윤봉길 홍구 공원 폭탄 투척

1933년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 장개석 장군과 친교.

낙양 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 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1936년 이동녕 등과 한국국민당 창당

1937년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로 옮김

1938년 민족주의 3당 통합 논의하던 남목청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의 총격

1940년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감

            임시 정부 주석으로 다시 취임.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취임

            무장부대 편성 노력

1941년 12월 9일,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

1942년 7월 임시정부과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 체결

            연합군과 공동작전에 진력

1944년 주석 재선. 광복군 특별 훈련반 설치 후 미국 원조로 본토 상륙작전 추진

1945년 2월, 임시정부가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 선전포고

            11월 환국.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후 12월 28일 부터 반탁 국민운동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 조직되어 총리 취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명 의사 유골을 효창공원에 봉안

1947년 1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 취임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열리자 이승만과 반탁투쟁위원회 활동

            11월, 유엔 감시 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안 지지

            <나의 소원> 발표

1948년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4월 19일 남북협상 참여를 위해 평양행

            5월 10일 선거 이후 건국실천원양성소에 힘을 기울임

1949년 6월 26일 안두희 흉탄에 서거. 효창공원에 안장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 수여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53379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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