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오후 - 창비장편소설
윤정모 / 창비 / 199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환의 아버지는 기자였다. 문장이 좋았고, 입바른 소리를 했다. 그런 이유로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매 맞아 죽었다.

서연은 할머니와 둘이서 찢어진 루핑 집에 살았다. 두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갔고, 남한 사회에서는 남자만 성공할 수 있다는 할머니 믿음에 따라 한동안 남장을 했다.

웅변대회와 백일장에서 맞닥뜨리곤 하던 둘은 서로에게 끌렸다. 다만 그 강도와 이유가 사뭇 달랐다. 기환은 아낌없이 서연에게 주고 싶어했고,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싶어했다. 반면 서연은 기환에게 기대고 싶어했지만, 기환이 서연의 전부는 아니었다.

대학에 가서 둘은 동거했다. 생활비가 막연했으므로 기환이 행상을 하거나 단역 엑스트라를 하여 생활비와 학비를 댔다. 문학가가 되겠다는 꿈은 접은 지 오래였다. 서연은 기환의 그런 희생을 당연시했다. 그리고 한눈도 팔았다.

기환에게 집적이는 여자가 나타나자 기환은 서연의 질투를 유발하려 했다. 서연은 기환이 그럴 줄 몰랐으므로 화를 냈다. 서연은 사실혼 따위 법률 용어를 읊다 고시공부로 도피한다. 후에 서연은 사법고시에 패스해 판사가 된다.

한편 서연이 떠나자 절망한 기환은 수컷의 매력을 적극 어필하여 교사 아내를 얻지만 끝내 잘 되지 않아 이혼하고 만다.

시간이 흘러 30년쯤 지나 서연이 여성단체 추천을 받아 장관이 된다. 장관이 된 그녀에게 정권과 VIP가 바라는 것은 여성 몫의 구색이나 갖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의견을 가감없이 피력했고, 사관학교 강연 때는 월남전에 파병된 우리나라 군인이 용병에 다름 아니었다는 발언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서연은 경질된다.

경질된 서연은 도피길에 나선다. 그녀는 마치 누가 자기를 알아보면 그것으로 추락이 기정사실이 될 것처럼 사람들을 피했다. 강화에 자리잡은 기환의 전원주택은 서연에게 훌륭한 도피처가 되었다.

기환은 서연이 이제야 자기에게 돌아왔다고 느꼈다. 서연의 완곡한 거부도 부끄러움으로 느꼈고 청혼한 뒤 노년을 함께 보낼 꿈에 부풀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서연은 과거처럼 기환에게 기댄다. 그에게 몸을 열었고, 그가 제공하는 식사와 차량을 이용한다. 하지만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서연은 기환에게 자신을 모두 열어 보이고 그의 반려가 될 수는 없었다. 서연은 또 다시 기환을 떠나고, 기환은 서연이 사라진 철새 도래지에서 또 다시 혼자 남아 그녀가 정말 사라졌다는것을 뒤늦께 깨닫는다.

서연이 경질된 후 도피하는 이유는 후반부에 나오는데 그것은 서연의 아버지가 국군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인민군 간부로 6.25. 전쟁에 참전한 뒤 북의 인민무력부장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서연은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자신의 경질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도피길에 나선 것이다.

기환은 소설 속에서 매우 점잖은 말투를 쓴다. '~했소', '~했구려' 따위의 어미를 갖춰 쓰고, 클래식을 들으며, 상당한 재력으로 서연을 공주처럼 대접한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고 드러내 보이는 사랑의 몸짓 이면에는 질투심과 소유욕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온갖 상상은 결국 '청혼', '결혼', '동거', '성교'로 이어지는 '소유 관계의 끊임없는 재확인'에 불과하다.

한편, 기환은 자신의 아버지가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어떤 구명 노력도 하지 않는다. 역사적 진실에서 멀어져 개인적인 욕망에 집중하는 그에게 서연은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묻지만 기환은 이에 대해 대화하기를 거부한다. 서연은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이를 극복하고 뿌리내리려 하지만 기환의 과거와 성향 때문에 서연은 그에게 뿌리내릴 수가 없다. 소파수술 받은 자궁에 착상이 어려운 것처럼.

<꾸야 삼촌>의 드라마를 기대하고 펼쳤는데 어둡고 음울한 내용이다. 이뤄지는 사랑이라면 굳이 소설로 쓸 필요 없겠고,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사랑은 소설 소재로 좀 더 적합하겠지만 이제는 해피엔딩이 좋다. 중년 이후 중국 드라마에 빠져드는 이유 중 하나가 천편일률적으로 권선징악이라 마음이 편안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뻔한 결말의 뻔한 소설을 읽고 싶은 요즘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349863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