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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들어선 길에서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7
귄터 쿠네르트 지음, 권세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평점 :
문지 스펙트럼 외국 문학선 17권 <잘못 들어선 길에서>는 <잘못 들어선 길 및 또 다른 방황들 Auf Abwegen und andere Verirrungen, 1988년>에서 일부를 골라 번역한 작품집이다.
작품들은 사회주의 동독이라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비판, 전망 부재에서 오는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상, 거대 담론과 세계 개조에 대한 불신 등이 담겨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역사에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만들어낸 <역사적 유물론>에 따라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곧 펼쳐지리라는 신흥 사회주의 종교에 좌절한 작가의 음울한 중얼거림이 작품 저변에 깔려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아담과 이브>이다.
소설이 시작되면 '나'는 "아내는 허연 수염을 기르고 있는 데다가 대머리다. 우리는 시리우스로 가는 중이며 아직 아이가 없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곧이어 "신이 자기 본래의 전형을 본뜬 존재를 창조하려는 기도는 그 복사품인 우리가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던 경솔한 착각이 아니었을까" 라고 중얼거린다.
얼마 전, '나'는 우주선이 연락 두절 상태에 빠지자 납으로 봉인된 함에서 긴급 상황을 위해 작성된 명령서를 꺼냈다. 마치 <요한 묵시록>과 같은 명령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두 우주 비행사는 첫째, 우주선을 궤도에서 이탈시켜 지구와 비슷한 혹성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리우스 방향으로 전진시킨다. 둘째, 인간 생명체가 재생산되어야 하므로 종족 보존의 불가피성을 통찰하고 한 명이 성전환 수술을 받아야 한다.
화자는 명령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동료 E를 마취시킨 뒤 성전환 수술을 시키고 내켜하지 않는 E를 설득시켜 관계를 맺어 가며 우주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혁명 직후, 소비에트와 적군은 제국주의와 결탁한 백군을 상대로 오랜 내전을 치루면서 스탈린 일당 독재로 전환된다. 자본주의에 승리하기 위해 생산력 증대가 제1 과제라는 미명하에 자본가 대신 국가가 직접 착취하는 기형적인 체제는 사회주의 이상과 매우 동떨어진 기묘한 사회였다.
이러한 사정은 동구권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났는데, 동독 같은 경우 국가사회주의 종주국 러시아의 하위 파트너로서 이중의 질곡에 시달렸다.
도그마에 빠진 광신도들이 소아병적 태도와 교조주의로 무장하고 현실 사회를 미화하는 것 외 어떤 사상과 행동도 용납치 않는 닫힌 사회에서, 작가 귄터 쿠네르트는 SF소설 형식으로 동독 사회를 그려낸다.
유물론적 사관에서 말하는 지상낙원이라는 목적지에서 한참 벗어나(우주선의 궤도 이탈), 알 수 없는 또 다른 낙원을 향해 나아가며(시리우스행),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스탈린주의 경전을 맹목적으로 믿으며(긴급상황 명령서), 인간의 욕망을 강제로 거세한 채 관계를 가져야 하는 정신 나간 현실(교조주의). 그것이 귄터 쿠네르트가 이야기하는 국가사회주의의 아담과 이브이다.
<바라던 아이>는 더욱 직접적이다. 아이가 말을 하고 사고를 할 시기가 되어도 반푼이처럼 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자 부모는 그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아이가 미래를 예언한다'고 자위하는 내용인데, 형편 없는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현재를 밝은 미래를 예언하는 맹아적 시기에 불과하다고 선전하는 동독 지배자를 비아냥대는 것 같다.
이런 내용은 <잘못 들어선 길에서>에서도 반복된다. '바덴펠트'라는 곳을 향해 가던 두 부부는 어느 순간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깨닫는다. 길 한쪽에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것임에 분명한 집 한 채가 있었고, 작중 인물들도 그 집에 오줌을 내깔기고 악취가 난다고 질색한다. 그런데 그 집을 떠나 본래 목적지로 가려던 그 때 슐츠라는 인물은 머뭇대더니 "고향! 고향!"이라고 몇 번이고 외친다. 잘못 돌아가고 있는 동독 사회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행적인 태도로 머뭇대며 "고향!"을 외치는 반동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
그밖에 현대 SF 소설에서 꽤나 자주 차용해 먹는 아이디어가 담긴 소설이 있는데, <병 통신>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인간육체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하여 사회가 굴러가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하고 있고, <때아닌 안드로메다 성좌>는 P.D.제임스의 <콰이터스>에 나오는 노인말살계획과 유사한 이야기다.
<올림피아2>는 TV 뉴스 앵커가 어느 날 부터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와 -다른 의미로는 감시하는- 방송국에 찾아가 보니 로봇이 있었다는 결말이고, <G, 라는 남자와의 만남에 대한 검열관의 보고>는 시를 정치적 논리로 분해하고 검열하는 이야기다.
또, 자신이 살해한 사람은 그 집으로 배달해 처리토록 한다는 <가정 배달>, 감시와 통제 사회에서의 사랑과 불륜을 담은 <러브스토리-메이드 인 DDR(동독)>과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진다>, 인간의 삶을 과학적 진화론으로 규정하려는 <대리인>, 18세기 프로이센부터 히틀러 시대까지를 살아낸 강철인간 이야기 <동화적인 독백>이 실려 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174482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