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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평점 :
소설은 '천 년 후에도 사람이 존재할까?'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담)'는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주 오래 살아남아 인류 최후의 1인이 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한다.
소설은 ○(담)과 ●(구)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는 담의 이야기이고, ●는 구의 이야기다.
담은 이모와 살기 전까지 할아버지와 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절에 살던 이모가 내려와 담과 함께 살았다. 그동안 이모는 자기가 이모인 줄 몰랐고, 조카는 자기가 조카인 줄 모르고 살았다. 세상으로 내려온 이모는 콘크리트 건물이나 컨테이너 건물에 들어가 이러저러한 것을 만들어 돈을 벌어 담을 키웠다.
구의 부모는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했다. 구멍가게는 생계를 위한 돈을 만들어내는 데 적당치 않았는지 구의 부모는 빚을 졌다. 빚은 점점 불어났다.
구와 담은 여덟 살에도 아홉 살에도 같은 반이었다. 처음엔 담이 구를 괴롭혔다. 구는 자기를 괴롭히는 담이 조금 밉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어느 날, 담이 꾀병을 부려 학교에 가지 않은 날 구도 무엇 때문인지 학교에 가지 않았고, 골목에서 둘은 마주친다. '너 왜 여기 있어?' 라고 서로에게 물은 뒤 담은 이모를 사랑하듯 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구와 담은 붙어 다녔다. 흰설탕을 나눠 먹고, 이모 주머니를 뒤져 훔친 돈으로 군것질을 했다. 열두 살이 되니까 아이들이 놀렸다. 손을 잡고 다니지 말라는 어른들 말에 구가 손을 놓았고, 담은 외롭고 무서워서 화가 났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한동안 담은 구를 보지 못했다. 서로를 생각하며 집 앞을 서성이기를 반복하다 둘은 다시 만났다. 열두살 때와는 뭔가 달랐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열일곱 살이 되었고, 구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담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뒤 구가 일하는 공장으로 가서 구를 기다렸다. 거기서 여섯 살 어린 노마와 셋이서 그림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노마가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
노마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 구와 담은 만나지 않게 된다. 진주 누나라는 사람이 구를 챙겨주기 시작했고, 얼마 뒤 둘은 몸을 섞는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도 둘은 동거를 했다. 담은 구를 생각하면 괴로웠지만 밤이 되면 진주 누나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담은 구를 만나러 갔다가 둘을 보고 슬퍼졌다.
진주 누나에게 들이대는 남자가 나타나면서 둘은 헤어진다. 구는 입대했고, 제대한 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담을 찾아간다. 구를 본 담은 '왔어?' 한다. 그리고 손에 들린 고기를 함께 먹자고 한다. 담과 구의 곁엔 완벽하게 아무도 없었고, 담은 구에게 '같이 살자'고 말한다.
얼마 뒤 구에게 사채업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구의 부모가 남긴 빚이 고스란히 넘어온 것이었다. 구는 개처럼 일했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담과 구는 사채업자를 피해 지방을 떠돌기 시작한다.
어느 날, 사채업자들이 나타났고, 구가 사라졌다.
얼마 뒤 담은 전화부스에서 서른 걸음 떨어진 으슥한 곳에서 구의 시체를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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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피울 땐 몰랐는데 담배를 끊은 뒤 의식의 밑바닥까지 침잠해 들어가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담배를 피우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의식은 통제를 벗어나 밑바닥으로 향한다. 온전히 온 우주로부터 단절되어 의식으로만 이루어진 불투명한 막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듯한 기분. LSD와 같은 환각제를 통해 인식의 문(Doors)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저 60년대 히피와 같은 황당한 주장인지 모르지만, 담배를 끊은 뒤 깊게 생각하는 일이 별로 없어졌다. 깊은 생각은 우울로 향한다.
<구의 증명>은 의식의 밑바닥에서 우울을 질료로 하여 쓰여진 소설 같다. 우울을 다루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어서, 자칫 잘못 하면 소설이 길을 잃을 우려가 있다. 긴 호흡으로 소설을 끌고 나가는 것도 어려운데, 등장 인물이 끊임 없이 작가를 끌어 당기기 때문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발짝만 잘 못 디뎌도 소설은 수렁에 빠져 질척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짧은 시기에 집중하여 글을 쓰고 빠져나오는 것만이 유효한 전략이다. 그런 면에서 ○(담)과 ●(구)로 나누어 시점을 달리한 것은 효과적인 선택이다. 아쉬운 점은 기호의 구분이 아니라면 누가 담이고 누가 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작가 최진영이 남성이라고 생각했다가, 소설을 30페이지쯤 읽었을 때 여성이구나 라고 확신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담과 구는 인연의 빨간 실이 이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한다. 어렸을 적에 둘은 학교를 빠지고 우연히 골목에서 만났을 때 '너 왜 여기 있어'라고 묻는다. 하지만 둘 다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 '왜'는 궁금한 사항이 아니다. '너 여기 있어'라는 존재에 대한 감탄으로 '왜'가 붙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선험적인 사랑은 증명을 요구 받는다. 공리(公理)와 같은 사랑으로 얼버무리기엔 작가가 선택한 질료 '우울'과 버성긴다. 그런데 하필 증명을 위한 시련으로 택한 게 '노마의 죽음'이다. 마치 부부가 아이의 죽음을 겪은 뒤 관계 속에서 고통만 상기하다 결국 이혼하고 마는 상황 같다. 하지만 노마는 담과 구의 아이가 아니다. 사랑의 증명을 위한 시련으로 선택될 만한 지위를 갖기엔 너무나 미미한 존재다. 그래서 노마의 죽음으로 둘이 헤어지는 상황은 다소 공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 누나와의 동거는 구와 담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열일곱 살 이전에 구와 담이 서로의 신체를 만지고 탐하는 묘사에는 묘하게도 근친상간적인 흔적이 어려있다. 미성숙한 신체간의 근친적 흔적을 지우고, '식인'이라는 극단적인 사랑의 형태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숙한 여인으로부터의 세례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진주'라는 이름은 적절하다. 상처가 난 곳을 메우기 위한 물질이 '진주'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가 사채업자에게 구타 당해 죽고 담은 구의 시체를 먹는다. 담이 구를 애도하기 위해 시체를 먹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본래 구와 담이 하나의 존재에서 파생한 두 개의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식이 담에게 천 년 뒤 홀로 남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구가 없다면, 다른 어떤 존재도 의미가 없으므로 담은 홀로 남길 바란다. 의식의 밑바닥으로 침잠해 들어가 고치를 틀고 웅크리고 앉아 천 년을 기다려 홀로 남게 되면, 그제서야 담의 욕망은 완성된다. 증명이란 본래 비본질적이고 우연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는 사상(捨象) 끝에 가능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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