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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루이 블레리오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생계를 위해 전기면도기나 의약품 설명서 따위를 닥치는 대로 번역한다. 벌이는 그다지 시원치 않아 아내 사빈이 안정적으로 벌어 들이는 수입에 기생하고 있으며, 때때로 옛 동성 애인을 찾아가 이런 저런 얘기를 들어주고 그 댓가로 푼돈을 우려낸다.
어느 날 영국 여자 노라가 블레리오에게 돌아온다. 그녀는 2년 전 블레리오의 곁을 훌쩍 떠났다. '2년 동안 시련의 시간에 갇혀서 늙어 가는 일에만 스스로를 체계적으로 적응'시켜 가던 블레리오는 노라에게 왜 자신을 떠났는지 묻는다. 노라는 '돌아와 자기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나는 그런 여자야.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걸 느껴야만 하지' 라고 대답한다.
한편 노라는 영국에서 증권중개인 머피의 선의에 기대어 생계를 의탁하다 그를 훌쩍 떠나 블레리오에게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노라는 떠나면서 5천 유로를 들고 왔지만 머피는 그 돈을 도둑 맞았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더 달라면 더 주었을 남자였다.
다시금 욕망에 사로잡힌 블레리오는 노라와 정사를 벌인다. 욕망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블레리오는 사빈을 속이는 일을 점차 힘겨워하다 결국 노라와의 전화 통화를 들키고 만다. 사빈의 냉담한 태도에 묵인의 분위기가 풍겼으므로 블레리오는 사빈의 출장지를 따라가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그 여행이 노라의 심기를 건드려 블레리오와 노라는 심하게 다툰 뒤 헤어진다. 이후 사빈이 블레리오에게 퇴거 통보를 내림에 따라 블레리오는 비 맞은 떠돌이 개 신세가 되고 만다.
영국으로 돌아간 노라는 신경쇠약에 걸려 미쳐버리고, 머피는 미국으로 떠난다. 블레리오는 노라를 찾아가지만 과거와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끄 라깡은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궁정풍 연애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욕망이란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현대 사회에서 궁정풍 연애와 유사한 상황에 투신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불륜이 아닐까 한다. 이미 실현된 관계를 버리고 실현될 수 없는, 즉 법과 도덕이 금계를 쳐놓은 관계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기사가 되고 상대방은 The Lady로 화한다. 금계를 느끼는 순간순간 욕망은 증폭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기존 관계가 해소되어선 안된다는 점이다. 기존의 관계, 즉 당초 혼인관계가 파국을 맞는 순간 '불륜'은 '건전한 연애' 로 변화한다. '건전한 연애'에는 금계가 없고, 금계가 없는 곳엔 욕망이 없다. 속된 말로 '새것이 헌것'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욕망은 지금의 이 관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금계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이것이 욕망의 변증법인지도 모른다.
블레리오는 기사로 남았어야 했지만 사빈과의 관계가 단절됨에 따라 기사 작위를 잃어버린다. 기사가 아닌, 법적으로 정사를 벌임에 아무 제약이 없는 블레리오는 노라를 적극적으로 욕망하지 못하고, 노라 역시 블레리오가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블레리오는 새로운 여자와의 관계에서 대단히 수동적이고, 욕망의 대상을 잃어버린 노라는 분열 상태가 되고 만다. 한편 이러한 욕망의 관계에서 '선의'로 노라를 대한 머피는 나선의 계단을 벗어나 미국으로 떠난다. 그의 행동준칙은 욕망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0년 프랑스 페미나 상 수상작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지루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소설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117674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