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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들 쓰십시다 ㅣ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 1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1965년 <퇴원>으로 소설 활동을 시작한 이청준의 문학전집이 2000년 열린원에서 발간되었는데, 발간 당시 기준 장편 11권, 중단편소설 10권, 연작소설 3권, 산문집 2권, 동화집과 별권 1권 총 28권 분량이다.
<자서전들 쓰십시다>는 연작소설 제1권으로 70년대 '남도 사람' 연작소설을 엮은 <서편제>와 일부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소설집은 단편 <떠도는 말들(언어사회학서설①, 1973.2월)>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자서전을 대필하는 윤지욱이라는 인물이다.
눈 내리는 어느 날, 잘못 연결된 전화기 건너편 여자가 치근댄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장난질 치는것이라 여겨 전화를 끊으려 햇으나 그녀는 윤지욱을 '윤 선생님'이라 불렀고 그의 직업이 기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거두절미하고 만나뵙기를 청했으므로 윤지욱은 그녀가 지정한 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윤지욱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는 자신이 심한 감기에 걸려 약속을 어겼노라고 변명했다. 전화를 끊고 이번엔 윤지욱 편에서 병원을 찾아갔으나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얼마 후 다시 여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자는 혼선된 전화통의 또 다른 남성에게 지욱에게 그랬듯 수작을 걸었다. 지욱은 이것은 말 유령들의 교미라고, 음란스럽고 허망하고 정처 없는,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들끼리도 서로서로 복수를 꿈꾸고 있는 음흉한 말들의 교미라고 생각했다.
모든 말들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여 말들의 주소를 바꿔놓음으로써 말들을 혹사했고 말들을 배반했고, 결국에는 그 말들이 기진맥진 지쳐나게 했다. 말들은 그들의 고향을 잃어버렸고 자신들의 고향에 대한 감사와 의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배반당한 말들은 자유였다...... 그러나 말들은 이제 정처가 없었다.(30p)
말이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이청준의 문제의식은 <자서전들 쓰십시다(언어사회학서설②, 1978. 8월)>로 확대된다.
윤지욱은 유명한 코미디언 피문어 씨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에 착수했다. 하지만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며 나의 웃음은 나의 웃음이 아니다. 나의 말은 관객의 말이며 내 웃음 또한 관객과 청중의 웃음일 뿐이다. 내 말과 웃음이 이미 나의 말과 웃음이 될 수 없으매......' 라는 문장을 써놓은 뒤로 영 진도를 빼지 못하고 있다.
말들은 과연 이제 정처가 없었다. 말이 존재의 집이라면, 말의 집은 또한 존재의 실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들은 이제 그 실체의 집을 떠난 지 오래였다.(51p)
이러한 윤지욱의 인식은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고, 급기야 피문오씨에게 장황하게 자서전 대필을 그만두겠노라는 편지를 쓰게 된다.
그런 식으로 남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제 머릿속에서 멋대로 창작해 내고 그럴듯하게 분장시켜 나가는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언제부턴지 모르게 제겐 차츰 허망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요......(55p) 엉터리없는 자서전으로 하여 보다 치명적인 자기 기만에 빠져 그 두꺼운 도배지 속에 감금된 과거로부터 영원히 풀려날 길을 잃고 만 것입니다. 저는 제 자서전 대필업으로 하여 그들을 과거의 갈등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것 속에 감금시키는 일을 계속해 온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어두운 과거도 아름답게만 회상되고 과오도 미덕으로 미화되기 쉬운 것이 자서전 집필의 위험스런 함정일진대, 하물며 그런 과거에서조차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꾸며낸 인간사라면 그것이 얼마나 완벽하고 위대해 보일 수 있겠습니까...... (58~59p)
윤지욱은 피문오 씨 같은 사람의 자서전을 거짓으로 펴내면 '능력 없는 자가 억지로 지어낸 거짓의 동상'만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피문오 씨 다음으로 자서전 집필이 예정되었던 최상윤 선생을 찾아간다. 선생은 10만 평의 황무지를 자신의 힘만으로 옥토로 바꾼 농사꾼이었다. 그는 최상윤 씨와 같은 이의 삶을 쓴다면 자서전으로서의 어떤 순기능이 실현되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최상윤 선생을 만나보니 그는 신념으로 똘똘 물칭 인물이었고, 윤지욱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논리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신념은 맹목적인 아집에 그칠 위험성이 있었고, 회의 없는 신념은 맹목적 자기 독단으로 흐르리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회의 없는 자서전이야말로 영락없이 한 거인의 동상에 불과할 터였다.
결국 최상윤 선생의 자서전 쓰기도 포기하고 돌아온 윤지욱에게 피문오 일행이 들이닥쳐 찍자를 붙는다. 이런저런 협박과 회유를 해대는 피문오가 고물 라디오나 시계 고치는 사람들처럼 골목골목 외고 다니지만 않았다 뿐이지 먹고 살겠노라 일을 맡아간 거 아니냐, 하면서 능청스런 목소리로 외치는 말이 윤지욱에게 아프게 와 닿는다.
"고장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시다아-- 채권 삽니다아-- 부서진 우산이나 빈 병 삽니다아--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지배와 해방(언어사회학서설③, 1977. 봄>에서 윤지욱은 오접 전화 사건과 자서전 대필 일에서 '떠도는 말'과 '살아있는 말'의 화해에 실패한 뒤 말들의 지나친 혹사와 학대로부터 비롯된 말들의 무서운 복수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 강연회나 세미나를 쫓아다니면서 연사들의 강연이나 토론 내용을 녹음해 들이는 일에 열을 냈다. 말을 감금해두기 위해서였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말들의 집단 수용소를 차려 감금해 두었다가 말을 만나고 있는 자의 책임을 감당해 보자는 것이었다. 말을 부린 자와 말과의 약속을 따질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녹음한 이정훈 이라는 소설가의 강연을 녹음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왜 쓰는가, 글은 왜 쓰는가, 작가는 무엇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또 써야 하는가, 작가의 소설은 어떤 동기와 욕망과 충동의 힘에 의해 씌어지며, 그것은 또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에서 씌어지는가...(102p)
그가 애초에 글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바깥 세계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 때문이었습니다...(116p) 최초로 글을 생각하고 그것을 써보고 싶어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와 깊이 관련되고 있는 그의 삶의 욕망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17p)
개인적인 삶의 위로와 구제, 한술 더 떠 복수심, 더 나아가 그 현실의 질서를 자기 식으로 뒤바꿔놓고 싶은 욕망, 그가 꿈꾸고 모색해 낸 새로운 질서로 그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 그러한 지배 욕망은 과연 한 작가와 독자 사이를 구체적으로 연결 짓는 어떤 조화로운 관계 질서를 창조해 갈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파괴만을 꿈꾸는 복수심에서와는 달리, 그의 독자에 대한 명백한 문학의 책임 문제가 뒤따르게 되는 것...(124p)
새로운 세계로의 출구를 열어젖힌 순간에 그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내맡기고 자신은 또 다른 세계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작가는 당연히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127p)
결국 이정훈에 따르면 당초 글쓰기 욕망은 개인 차원의 위로, 구제의 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같은 욕망은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현실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나아가 현실 사회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뒤바꾸고 싶은 욕망으로 발전한다. 소설가는 자신이 구축한 새로운 세계상이 독자에게 호소력을 발휘하여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동의과정은 영속적인 상태가 아닌데 작가는 또 다른 소설을 쓰기 때문이다. 새로운 소설은 새로운 세계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억압'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글이 주는 억누름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한 삶, 본래의 자유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로므로 작가는 자유의 질서로서 독자를 지배해 나감으로서 억압이 아닌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
그리고 작가노트를 통해 평론가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 일부를 인용한다.
그것은 인간의 꿈이 가지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인간이 현실적인 삶 자체의 조건들에 쫓기는 동물들과 다른게,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꿈꾸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쓸모 없는 것을 꿈꾸는 일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 생활에 유용하지 않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삶을 억누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우리의 삶에 유용한 것이 아니며 우리 삶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억눌린 삶인가 하는 것을 반성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해 주며, 그러므로 몽상으로서의 문학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욕망의 노예 상태 속에 갇혀버린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해방시켜 주는 고마운 기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137p)
하지만 이청준은 윤지욱의 입을 빌어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언어사회학 서설 4편인 <가위잠꼬대> 그리고 <서편제>에 실린 언어사회학 서설 5편 <다시 태어나는 말>에서 탐구를 계속한다.
<가위잠꼬대(원제: 몽압발성, 언어사회학서설④, 1981.1월)>에서 윤지욱은 이정훈 등과 함께 무기력증에 빠져 다방에 죽치고 앉아 말을 조율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소설이고 시고 글들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말들은 이미 실체와의 약속 단계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세상을 떠돌고 있어 소설이고 시고 사람이 시도하는 어떤 통일적인 구조 속에 놓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 시기 사이비 부흥회가 공설운동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구원을 약속하는 거짓선지자의 사기행각에 말의 구원을 간절히 발하는 글쟁이 일원들 마저 드나들기 시작하는 희망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윤지욱은 말들의 배반과 긴 악몽이라는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 깊이 잠이 들어버리는 방법이 아니라 깨기 위해 고통스럽게 싸우는 길 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사회학 서설 연작 외 <빈방 - 혹은 딸꾹질 주의보(1979.여름)>, <건방진 신문팔이(1974.2월>, <미친 사과나무(1971)>가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