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공자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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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출국 - 공자와 안자

소설은 기원전 571년 소공(昭公) 25년,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노(魯)나라를 빠져나와 제(齊)나라로 향하는 첫 번째 출국(出國)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때 공자 나이가 35세. 공자는 훗날 <논어>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에 대해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志學), 30세에는 자립하였으며(而立), 40세에는 미혹하지 않게 되었고(不惑), 50세에는 천명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知天命), 60세에는 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순조로이 이해하게 되었으며(而順), 70세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慫心)" 라고 이야기 한다.

당시 노나라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 라는 일성이 터져나올 만큼 난세였다. 임금은 소공이었으나 정치권력은 삼환(三桓)씨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어 임금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군대는 세 집안의 사병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노나라 소공은 제나라로 망명해 명목 뿐인 주군이었다.

이때 제나라 군주는 경공이었는데 그의 곁에는 명재상 안영이 있었다. 공자는 안영을 '남과 잘 사귀었고 오랫동안 남을 잘 공경하였다'고 평가했고, '불법(不法)의 예'란 최상의 찬사로 극찬해 마지 않은 인물이었다. 안영은 형식적인 예절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를 행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영이 영공(靈公)과 장공(壯公), 그리고 경공의 3대를 섬기며 뛰어난 통치술을 펼치고 있는 제나라도 사실은 퇴폐와 사치에 물들어 병든 환부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공자가 그처럼 존경하던 안영은 사실 경공과 공자의 만남을 교묘하게 방해했다. 안영은 공자를 뛰어난 사상가로서는 인정하고 있지만 정치가로는 별로 신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유자(儒子)란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바른 규범을 지키지 못하여 알맹이가 없는 법입니다." 이것이 공자에 대한 안영의 평가였다.

반년이 지난 후 경공을 만난 공자는 '정치는 재물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답함으로서 제나라의 근심이 사치에 있음을 밝히고, 음악을 통해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는 진언을 들려준다. 하지만 안영의 지속적인 반대로 경공은 공자를 등용하지 않는다.

제나라로 망명 온 지 거의 일 년 만에 경공을 두 번째로 알현하게 된 공자에게 경공은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는다. <논어>의 안연(顔淵)편에 그 대화 내용이 실려 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는 공자의 정명주의(正名主義)에서 비롯된 말로, 정명이란 '명분을 올바르게 한다' 또는 '명칭(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나 명분과 꼭 맞는 올바른 상태에 있는 것이 질서의 극치'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다시 공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공을 안영은 재차 막아선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권력이 대부들에게 있지 아니하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백성들이 혼란되지 않는다(天下有道 則庶人不義).

공자는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야 말로 '하늘 아래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안영은 공자의 그러한 정치철학은 현실을 무시한 보수적인 낡은 정치관이라고 생각했다. 안영은 이미 제후중심의 '지방분권제'가 도래하였음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정치를 펴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출국 - 노자와 공자

공자의 출생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숙량흘은 안씨(顔氏)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사생아로 기원전 551년(양공 22년) 음력 8월 27일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 지금의 산동성 곡부 남쪽 2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추현(鄒縣)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였는데, 키가 9척 6촌으로 매우 컸고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구(丘)라 하였다고 묘사된다. 사회에서 벼슬할 수 있는 계급 중 가장 낮은 신분인 사(士) 계급의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으나(孔子貧具賤) 어렸을 때부터 예기(禮器)를 진열하고 놀 정도로 예에 대한 태도가 선천적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506년, 공자는 남궁경숙(南宮敬叔)과 주(周)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첫 번째 출국 이후 다시 9년 만의 출국이다. 이때 공자의 나이 46세였다.

노나라 주군 소공은 7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으나 끝내 객사했고, 그 뒤를 이어 정공(定公)이 왕위에 올랐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 무렵 노나라 정치는 계손씨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는데, 이 계손씨는 또한 신세력으로 대두된 양호(陽虎)에 의해 견제되고 있었다. 계환자와 양호 모두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므로 공자는 피곤한 처지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존경하였던 인물로 주의 노자, 위의 거백옥, 제의 안평중, 초의 노래자가 있는데 공자는 지금 그 중 한 명인 노자(老子)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어렵사리 노자를 만난 공자는 예에 대해 가르침을 달라고 청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그러니 그대도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는 말일세."

공자는 노자와 만난 후 '제자들에게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분이셨다', '내가 알기로는 노자는 모름지기 무위의 도를 닦는 분인 것 같다' 라고 말했다 한다. 노자가 쓴 유일한 경서 <도덕경>의 첫 구절이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로 시작하고 있다. 예에 대한 질문에 노자는 무위의 도를 이야기한 것이고, 공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를 잡고 물고기를 낚는 인간사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한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 도란 사람이면 반드시 통과하여야 할 문(門)이라면, 노자에게 있어서 도는 통과해야 할 문조차 없는 무문(無門)이라고 보았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대도무문(大道無門)과 어찌보면 일맥상통한다.

황금시대

기원전 501년, 노나라 정공 9년 공자는 마침내 중도재(中都宰)란 벼슬로 오랫동안 꿈꿔왔던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이때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공자는 상대적으로 강대국인 제나라의 위협과 견제에 맞서 여러가지 활약을 펼쳤고 이 덕분에 육경 중 하나로 국토를 다스리는 사공(司空), 이후 형옥을 관장하는 사구(司寇)의 벼슬까지 오른다.

공자는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제대로 되고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라며 백성들의 다툼은 너그럽게 처리하고 권신의 위법은 추상과 같이 엄격히 처분했다.

일 년 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인 대사구(大司寇)에 올랐다. 정치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펼친 공자는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삼환씨의 세력을 제거하고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을 중심으로 한 정권의 회복과 군사력의 통일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51세에 중도재가 된 이래 55세에 대사구로서 재상의 일을 겸직하는 5년의 황금기는 전혀 뜻밖의 일로 끝나게 된다.

당시 제나라는 명재상 안영이 죽고 여서가 경공을 보필했다. 공자의 활약으로 노나라가 차츰 부강해지자 경공은 노나라에 땅을 떼어주고 화친하려 했다. 하지만 여서의 생각은 달랐다. 여서는 자신이 직접 아름다운 여인 80명을 골라 뽑고 좋은 말 120필을 골라 노나라 정공에게 선물로 보냈다.

<논어> 미자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을 보내왔다. 노나라의 계환자가 이를 받아들여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조회(朝會)를 하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이에 노나라를 떠났다'

대사구 재상직을 55세에 버리고 자기 이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 국외로 여행길에 오른 것이 56세. 그 뒤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 것이 기원전 484년, 노나라 애공 11년, 공자 나이 68세 였으니 13년 동안 열국을 주유하며 '상갓집의 개(喪家之狗)'의 처지가 될 고달픈 시절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세번째 출국 - 상가지구(喪家之狗)

기원전 496년 노나라 정공 14년, 56세의 나이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를 찾아간다. 위나라 영공은 무도했지만 그 밑에는 현명한 신하가 많았다. 공자는 위나라 대부 사어(史魚)는 정직한 사람이고 거백옥(籧伯玉)은 참군자라고 말했다. 공자는 영공의 인재 발탁 능력을 믿고 기대를 걸었다.

위나라에 가니 군사에 뛰어난 무장 왕손가가 공자를 찾아왔다. 그는 "옛말에 이르기를 아랫목에 아첨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부뚜막에 아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라며 공자를 떠본다. 실권을 가진 자신에게 잘 보이는 것이 어떠한가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게 된다"고 답한다.

얼마 후 위나라 영공이 만나기를 청했다. 영공은 공자에게 6만 두의 봉록을 주기로 하나 공자에 대해 참언하는 신하들에 휘둘려 공자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해 둘 뿐 등용하지 않았다. 이에 10개월 만에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 조나라, 송나라, 정나라 등을 떠돈다. 이 과정에서 감금과 굶주림을 겪으며 상갓집의 개와 같은 처지가 된다.

이듬해인 495년 57세의 공자는 정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도착한다. 그러나 3년을 머무는 동안 진나라 임금 민공(湣公)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며, 정치적 활동도 벌이지 못했다. 공자는 웅대한 뜻을 품고 주유천하의 행각에 나섰으나 5년 동안이나 허송세월하게 되자 탄식했다.

59세에 공자는 다시 위나라로 향한다. 세번재 위나라 입국이었다. 영공은 노쇠했고, 공자를 무용지물로 생각했다. 이때 공자가 한 말이 <논어>의 자로편에 기록되어 있다.

'진실로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일 년이면 그 나라를 바로 잡을 수가 있고, 3년이면 완전한 정치의 성과를 올릴 수가 있으련만(苟有用我者 基月而已可也 三年有成)'

또 다시 위나라를 떠난 공자의 신세는 '썩어서 먹을 수 없는 박, 쓸모없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박'과 같은 처지였다. 공자는 급박한 처지에 절망해 진의 대부 조간자가 자신들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실권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몸을 의탁할 결심을 한다. 하지만 황하를 건너기 직전 조간자가 두명독과 순화라는 두 사람의 어진 현인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강을 건너지 않고 한탄한다.

이때 거백옥이 공자를 초청하여 그는 다시 위나라에 간다. 하지만 전보다 더 초라한 식객 신세였다. 영공은 공자를 무시했다.

기원전 492년, 60세의 공자는 진나라로 향한다. 진나라에서 공자는 2년 이상 머물렀지만 그는 등용되지 못했다.

그해 가을 노나라 계환자가 병으로 죽으면서 후계자인 계강자에게 공자를 초빙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주변 신하들의 만류하자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 염유)를 등용한다. 염구는 계강자의 가재(家宰)가 되어 공을 세운다. 염구가 등용되기 전 또 다른 공자의 제자 자공은 "자네가 노나라에서 드용되어 큰 공을 세우면 선생님을 잊지 말고 반드시 불러 모시도록 하게나"라고 당부했다.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간다.

네 번째 출국 - 양금택목(良禽擇木)

기원전 490년 노나라 애공 5년. 공자 나이 62세에 섭나라를 찾아간다. 묵묵히 스승을 따라 수행하던 제자들도 서서히 권위와 가르침에 반기를 들거나 벼슬을 찾아 떠나갔다. 섭공은 공자 일행이 자신의 영토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묻는다. "그대의 스승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이에 '자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사기>는 기록한다.

공자는 자로를 불러 "너는 왜 섭공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스승의 사람된은 도를 배우기에 게으르지 않고, 사람 가르치기를 싫어하지 않고, 도를 즐기기를 밥 먹는 것을 잊을 정도이며, 또한 가난을 근심하지 않아 어느새 늙어 노년에 이른 것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공자는 이후 섭공을 두 번 면담하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채나라로 간다. 그리고 3년쯤 되던 해 초나라 소왕이 공자를 초빙한다. 채나 섭과 달리 초나라는 대국이었고 소왕 역시 공자가 어진 임금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을 만큼 인격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와 채나라 대부들은 아연 긴장한다.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에 오래 머물러 제후들의 약점과 대부들의 비행을 낱낱이 알고 있었으므로 초나라 소공에게 등용된다면 자신들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군사를 풀어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포위한다.

이때의 곤경을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자로가 성이 나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군자도 곤경에 빠지기 마련이다. 다만 소인이 곤경에 빠지면 함부로 굴게 되는 것과 다를 뿐이다."

사면초가에 빠진 공자는 위기 극복을 위해 외교술에 능한 자공을 소왕에게 보내 실정을 알리고, 소왕은 곧 군사를 보내 공자 일행을 구해준다. 이때 소왕은 공자에게 서사(書社)의 땅 7백 리를 봉토로 떼어주는 조건으로 공자를 초빙하려 했다. 하지만 재상 자서(子西)가 반대한다. 2만여 호의 영지를 공자에게 주었다가 외교술에 뛰어난 자공, 용감한 장수 자로, 탁월한 행정가 재여,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지휘할 수 있는 안회의 보좌를 받아 초나라를 능가할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간언한 것이다. 소왕은 망설임 끝에 초빙계획을 취소하고 그해(기원전 489년) 가을 군막 안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다. 이로써 공자의 마지막 희망도 물거품이 되버린다.

소왕이 죽은 뒤에도 공자는 선뜻 초나라를 떠나지 못한다. 자공이 말하였다. "여기 아름다운 옥이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이것을 궤 속에 넣어 감추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하였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我待賈者也)"

공자가 또다시 위나라를 찾아갔을 때에는 노나라의 애공 6년(기원전 489년) 공자 나이 63세 때였다. 위나라 영공은 이미 죽고 그의 손자인 출공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출공의 아버지 괴외는 자신의 아버지 영공의 음탕한 부인 남자(南子)를 죽이려다 실패해 외국으로 도망쳤는데 귀국을 가로막고 자신이 왕이 된 불효한 자였다.

위나라로 돌아가는 스승에 대해 제자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출공은 공자의 보좌를 받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는 출공이 관직을 주면 받을것이냐는 제자의 물음에 반드시 명분 먼저 바로잡겠다고 답한다. 이에 성질 급한 자로가 도대체 이름 같은 것을 바로잡아서 어찌하시겠다는 거냐고 따져 묻는다. 이에 공자가 답한다.

"군자는 바르지 않으면 언어의 도리가 맞지 않는 법이다. 언어가 도리에 맞지 않으면 하는 바의 일을 성취하기 어렵다. 하는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을 죄과에 알맞게 줄 수가 없게 된다. 형벌이 죄과에 맞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안심하고 놓을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군자란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 하고 말을 하였으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래서 군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명분이 바로 이름인 것이다."

이로써 제자들은 각자 뿔뿔이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자공은 노나라 초빙으로 사신으로 등용되며, 자로는 위나라 작은 마을의 읍재(邑宰)가 된다. 자공은 노나라에 외교관으로 등용된다. 하나 둘 제자들이 떠나가던 시절, 고향으로 부터 아내 올관(兀官)이 죽었다는 부고가 날아든다.

설상가상으로 몸을 뒤탁하고 있던 공문자(孔文子)가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 위해 공자엑 전쟁하는 법에 대해 물었다가 실수를 깨닫고 변명하자 공자는 "새가 나무를 선택해야지 어찌 나무가 새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良禽擇木 木豈能擇鳥)"라 한탄하며 말한 뒤 천하를 주유하였던 열정과 13년의 모든 지난 세월과 단절을 선언한다. 이로써 공자의 주유열국은 종말을 맞게 된다.

공자천주(孔子穿珠)

노나라 애공 11년, 기원전 484년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공자 나이 68세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가 73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6년간 공자는 노나라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한다.

자신을 '상인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옥(美玉)'으로 비유했던 공자는 자신을 팔아주는 상인을 만나지 못했다. 또한 자신을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진 진귀한 구슬'로 생각하고 있던 공자는 실을 꿰어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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