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른을 위한 동화 7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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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정이라는 가난한 나무꾼이 살았다. 어렸을 때는 장터에서 제법 싸움꾼 행세를 하였으나, 형님들이 한꺼번에 돌림병으로 죽고 어머니의 말문이 닫히자 사람이 달라졌다. 과묵하게 숯을 구워 새벽이면 내다 팔고 밤이면 산 밑 움막에서 잠들었다.

여러 해가 흐른 뒤 여느 날처럼 나무를 하러 간 정이 벌거벗은 여자를 발견한다. 상처입은 채 정신을 잃은 여자를 정성껏 보살펴 살려놓은 후 정은 여자에게 청혼했다. 여자는 자신이 누군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 채로 그리할 수 없다며, 보름달이 뜨면 대답하겠노라 했다. 정은 어쩐지 보름달이 뜨고, 달이 여자에게 말을 걸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 잡혔다. 정은 여자를 방 안에 끌어넣고 문에다 못질을 한 뒤 보름달이 사라질 때 여자를 취한다.

여자는 바느질을 했다. 솜씨가 좋아 차차 소문이 퍼졌고, 일감이 늘어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아들을 낳았고, 땅을 사들였다. 먹고 살 만해지자 시어머니가 바느질만 한다며 구박했다. 여자는 익숙치 않은 부엌일을 하며 가슴에 불덩이를 키워 갔다. 얼마 후 두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여전히 정은 여자를 보름달이 뜨면 방에 가두었다.

여자가 갖바치를 찾아가 신 만드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갖바치는 여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대신 정절을 달라 했고, 여자는 이에 응했다. 사흘밤낮을 여자는 갖바치에게 신만드는 것을 배우고 몸을 내주었다. 나흘째 되는 날 정이 여자를 찾아냈다. 정은 여자를 해칠 수가 없어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냈다. 정은 질투와 상실의 고통 때문에 타죽을 것 같았지만 여자는 용서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만든 가죽신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보름날 밤, 정이 집을 비운 사이 여자가 달을 보게 된다. 달은 여자에게 '여인은 나를 따라 걸어라' 라고 말을 걸었다. 달이 흐르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폭포에 다다랐다. 달이 '아홉 번 숨을 들이마시고 그대의 노래를 부르라'고 말했다. 따라하니 늑대들이 나타났다.

늑대 무리는 여자가 자신들의 일원이라 했다. 따라 나서겠느냐고 묻는 늑대에게 여자는 정과 시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으니 말미를 달라했다.

돌아온 여자는 인간 세상에서 지은 인연에 묶여 늑대 무리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여자의 야생성을 일부 가져가자 여자는 그때부터 신을 짓지 않고 살림을 시작했고 일상의 삶이 주는 행복에 젖어든다. 하지만 그런 행복이 가져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깨어질 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된다.

정과 아들이 돼지를 접붙이기 위해 마을로 간 어느 날 화적떼가 들이닥쳐 여자의 딸을 겁탈한다. 딸은 이때 상처로 앓다가 죽고, 도망치는 화적을 쫓아간 아들도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 세상에서의 삶이 다해가고 있음을 직감한 여자는 정에게 자신을 놓아 달라고 한다. 산에 가서 죽겠다고 했다. 정은 마지막으로 여자를 위해 산에 집을 지어 주고 갖신 만들 재료를 넣어준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온 어느 날, 막 만든 가죽신 한 켤레가 여자에게 말을 하였다. "나를 신으세요" 여자가 신을 신자 신이 늑대들에게 가는 길로 다시 인도했다. 늑대가죽을 뒤집어 쓰자 여자는 젊고 어여쁜 흰늑대로 변했다.

다음날 정은 산에 올랐다가 여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 계곡 아래 깊고 푸른 소에 몸을 던졌다. 정이 버둥대는 동안 때 아니게 푸른 단풍나무 잎들이 수수수 떨어져 물을 덮었다. 푸른 나뭇잎과 신발이, 그리고 다시 푸른 나뭇잎이 한 잎 한 잎 계곡으로 흘러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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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야생성을 간직한 '늑대'인데,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난 연후에 결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과 존재의 확인이 생활에 우선하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달에게 물으려 한다. 달은 해와 달리 매일 모양을 달리한다. 변화하고 배반하는 달이 여자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반면 남자의 관심은 현세의 삶, 대낮의 생활이다. 남자는 보름달이 사라진 후 여자를 겁탈한다. 남자는 처녀성을 빼앗으면 여자를 자기 소유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녁을 행복하게 해줄게' 라고 말하지,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말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가 부여한 적도 없는 굴레를 스스로 짊어지고 사뭇 비장해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유일한 관객인 연극이다.

여자는 갖신을 배우기 위해 갖바치에게 주저없이 정절을 줘버린다. 여자에게 있어 정절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자 혼자 정절로 상징되는 허구의 행복에 집착해서 질투하고, 상실의 고통을 곱씹는다.

여자는 한동안 삶에서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달이 차면 이지러지듯 여자가 다시 늑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딸의 죽음이다.

젊은 아들(남자)은 딸을 잃은 어머니 곁을 지키지 않고 화적떼를 뒤쫓아간다. 화적떼를 죽여 복수한다고 어머니의 상실감이 채워지는 것도 아닌데, 젊은 수컷의 사고회로는 그런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제거(해결)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실감이나 슬픔은 치료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언가 잘못되면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매일같이 동그란 해가 떠오르듯이.

전경린은 아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여자의 곁에 남은 것은 이제 늙고 지친 정 뿐이다. 늙은 남자, 거세된 수컷이 된 후에야 정은 삶의 비밀 한자락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여자는 남자와의 삶을 정리하고 늑대로 돌아간다. 남자와 여자는 죽음, 혹은 떠남의 순간이 되어야 서로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정은 여자가 없어진 걸 확인한 순간 목숨을 내던진다. 정의 삶은 여자라는 변화무쌍한 존재에 기대어 항구성을 획득했다. 그러므로 변화무쌍한 여자가 사라지면, 그 대척점에 있는 정의 삶은 의미를 상실한다.

여자가 어디에서 왔는지(정체성) 알지 못할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정절(안정)을 내던지고, 언제든 삶에서 훌훌 도망칠 수 있는 옷(바느질)이나 갖신(신발)을 지어내는 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처녀성(정절)을 빼앗거나, 아이를 셋 낳게 만들거나, 옷과 신발을 숨기는 행위의 이면에는 처녀성과 정절에 대한 그릇된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여자의 정절을 빼앗으면 내것이 된다는 생각, 아이를 셋 낳게 만들어 그 기간 동안 성적 경쟁자로부터 격리시키는 행위, 옷과 신발을 감춰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감금은 여성의 처녀성과 정절을 남성이 지배하고 관리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관리를 행복의 비밀이라고 잘못 이해한 남성은 질투와 상실의 불안을 댓가로 치뤄야 한다는 점이다.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의 전경린식으로 변주인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여자 입장에서 읽어도 슬프고, 남자 입장에서 읽어도 애닯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718636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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