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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ㅣ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을 멈춘 연쇄살인범이 있다. 그는 이십오육년 전 마지막으로 살인을 했다. 살인을 멈춘 것은,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살인자는 열여섯에 첫 살인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죽였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첫 살인 치고 나쁘지 않았다. 그 뒤로 수의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30년간 훌륭하게 사람들을 죽여왔다.
그러다 사건이 일어난다. 시를 배우기 위해 드나들던 문화센터에서 살해한 은희 엄마가 죽기 전 절규한, "제발 우리 딸만은 살려주세요"가 그의 마음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은희 엄마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고, 뇌수술을 받은 뒤 그의 살인 충동이 사라진다. 살인자는 은희를 입양해 키우면서 정적과 평온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마을에 자신의 동업자가 나타나면서 살인자는 다시금 묻어두었던 본능을 일깨운다. 연쇄살인범은 은희가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 박주태가 틀림 없었고, 다음 대상은 은희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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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트릭의 문제는 독자를 뻔뻔하게 속여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들은 독자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여러가지 보완점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중 그럴싸한 대책이 바로 화자의 기억을 화자 스스로도 믿지 못한다는 설정이다. 일시적인 기억상실, 정신착란, 환각 등등. 이것은 나중에 썩 괜찮은 변명이 된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화자는 알츠하이머라는 패를 쥐었다. 이제 작가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 결말을 손에 쥐게 된다.
작품 속 살인자가 엉뚱한 말을 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은희 엄마 살해 사건 부터이다. 사실 그는 은희 엄마뿐 아니라 은희도 살해했고, 그 직후 일어난 교통사고로 살인충동이 거세된 것이다. 은희를 입양해 키웠다는 것은 말짱 헛소리이고, 실상은 알츠하이머 때문에 요양보호사로 오는 동명의 은희를 자신이 입양한 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이다. 게다가 연쇄살인범 박주태 역시 자신을 끈질기게 뒤쫓는 형사이다.
모든 것이 들통난 뒤에도 살인자는 반야심경의 구절을 외우며 피안의 세계 속으로 숨어들 뿐 자신의 죄책감을 직시하고 기억의 진위를 가리는 것을 거부한다.
작품 말미에 실린 류보선의 <수치심과 죄책감 사이 혹은 우리 시대의 윤리>에 꽤나 소상한 작품 분석이 실려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662705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