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몫 ㅣ 테이크아웃 11
최은영 지음, 손은경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9월
평점 :
해진은 대학 도서관 입구에서 정윤을 마주친다. 그녀의 결혼식 때 본 것이 마지막이니 꽤나 오랜만이다. 해진의 상념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진은 정윤을 글을 통해 먼저 알았다. 도서관 앞에 쌓인 교지에 실린 <A여자대학교에서의 집단 폭력, 일부 학생들의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기사. 그 글이 주는 반향에 이끌려 해진은 교지 편집부에 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글쓰기에 재능 있는 동기 희영을 만난다.
정윤은 해진의 글을 읽고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희영의 글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윤은 희영에 대한 애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희영이 매 맞는 아내, 기지촌 문제 등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사로 쓰고자 하지만 편집부 분위기는 냉담했다. 반제반봉건 기치를 내건 남성중심 문화가 교지편집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여성문제에 대한 감수성도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정윤은 처음에 희영의 편에 서서 옹호하는 발언도 했지만 희영의 주장이 강해지자 그녀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3학년이 된 희영과 4학년이 된 정윤이 교지편집부를 떠난 후에도 해진은 그곳을 지킨다. 그녀는 더 이상 더디게 글을 쓰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해진은 기자의 길을 가게 되고, 희영은 기지촌 활동가가 된다. 정윤은 대학원에 진학 했다가 같은 교지편집부 선배 용욱과 결혼하면서 미국으로 떠난다.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고 용욱을 뒷바라지 한다고 했다.
정윤과 희영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희영은 정윤이 했던 말들을 활동하는 내내 고민하고 반추하며 들여다봤다.
희영은 정윤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서른아홉의 희영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임종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해진은 슬픔 중에서도 작은 안도를 느꼈다. 해진은 희영이 남긴 말을 정윤에게 메일로 보냈다. 언니에게 관대하지 못했던 것,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편지들에 답하지 않았던 것들이 미안했다는 말들을. 정윤은 답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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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도에 소련이 붕괴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있던 시기만 해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니 반제국주의 반봉건이니 해가면서 실존 모델(소련, 북한 등등)에 다가가기만 하면 되었는데, 소련이 붕괴되니 실재하는 모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계급갈등이나 남북분단 문제가 주요 갈등이니 모든 역량을 거기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논리에 희생되었던 모순들. 여성 문제, 환경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등등
작품은 주요모순 해결을 위한 전략적 글쓰기를 남성적 어조로 이야기하는 편집부원과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희영이 대립한다. 편집부원들의 선언적인 방향 제시에 희영의 항변은 힘을 받지 못한다. 붕괴된 사회주의의 망령이 살아있는 작은 아픔들을 누르는 것 같다.
정윤은 희영을 이렇게 찍어 누른다.
"본인이 돌아가신 분과 같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거 오만한 생각 아닌가. 너무 다른 입장 아닌가. 희영은 그런 삶을 경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그런 삶에 대해 모르면서... 희영이 그렇게 가난해 본 적 있어요? 몸을 팔아야 할 만큼?"
자격을 들먹이면, 한발 걸친 자는 답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정윤은 잘 안다. 희영이 알지 못했던 것은 정윤 역시 저런 말을 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특정 담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자격 운운'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빗나간 결과를 가져온다. 담론의로 부터의 이탈, 또는 권리 획득을 위한 투신.
희영은 졸업 후 기지촌 활동가가 된다. 21세기판 브나로드 운동에 투신하는 함정에 빠진 것일까? 하지만 희영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작품에 등장하는 정윤의 기사는 아마도 96년도에 고대생 500여명이 이화여대에 난입해 깽판 친 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 작품은 90년대 중후반 대학교 교지편집부가 배경이다.
교지편집부는 참 애매한 성격의 집단이었는데,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부류가 대게 그러하듯 한발짝만 걸친 자의 리버럴함이 느껴졌다. 그들은 집회 때도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보도>라고 쓰인 하이바를 쓰거나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대열에서 소외시켰다.
희영의 고백은 어쩌면 교지편집부라는 공간, 혹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90년대를 건너온 작가의 자기고백인지도 모르겠다.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슬픔의 비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의 기로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리 강렬했다 하더라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나만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2인칭 시점으로 '당신'을 거듭 이야기하며 독자를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젊음을 견디는 소설'에서 적당한 전략인지 의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도식적인 느낌을 주는 구성, 무리한 2인칭 전략, 다분히 장치로서 삽입된 듯한 희영이라는 인물 등으로 인해 소설은 그다지 매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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