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끼 대산세계문학총서 142
다케다 다이준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다케다 다이준은 1912년 도쿄의 조센지라는 절에서 태어났다. 중국문학에 흥미를 느껴 도쿄 제국대학교 중국문학과에 진학했고,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그룹에 가입해 활동한 전력이 있다.

반전운동으로 체포된 다이준은 대학 중퇴 후 '중국문학연구회'를 창설하고 <중국문학월보>를 창간· 활동하다 1937년 보병으로 소집되어 중국 대륙에 파병된다. 이 시기 전쟁을 체험한 다이준은 '수치'라는 개념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그가 31세에 쓴 <사마천(1943)>은 "사마천은 살아남아서 수치를 당한 자이다"라고 시작한 뒤 "사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고통은 치명적이고, 자신도 타인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지면 사람들은 종종 커다란 일을 생각하고 싶어지는 듯하다. 사마천의 경우 생각한다는 것은 쓰는 것이고, 쓴다는 것은 '기록'하는 것이었다." 라고 쓴다.

문예평론가 가와니시 마사아키는 이러한 자각이 바로 다케다 다이준 문학의 요체라고 설명한다. 다케다 다이준은 삶의 본질은 수치를 참아내는 과정이고, 이를 기록하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라 생각한 것 같다.

작품집에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실제 일어난 식인사건 <반짝이끼 사건>을 모티프로 쓰여진 <반짝이끼>를 비롯한 네 편이 실려 있다.

<유배지에서, 신초(新潮) 1953년 3월호>

물살이 험해 탈출이 불가능한 섬에서 '나' 사보는 15년 전 고용인으로 살았다. 어느 날 '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타케에게 구타 당한 끝에 절벽에서 떨어진다. 오타케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기적적으로 생환한 '나'는 섬으로 되돌아온다.

오타케의 본명은 게누마. 경시청이 무정부주의자 조직에 심어놓은 스파이였다. 그는 신분을 숨기고 섬으로 흘러든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들먹이며 게누마를 협박해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이질적인 존재, 텐보(展望) 1950년 4월호>

혈기왕성한 사회주의 학생이었던 열아홉 살 '나'는 태생부터 자주독립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고, 동시에 딱히 달리 해야 할 일도 없었기에 승려가 되기로 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나'의 수도 생활은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끝내 다른 승려와 대립해 결투를 벌이기에 이른다.

사람들이 우리를 언제 부르러 올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는다. 이 세상의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면 남은 자들은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저세상과 관련되어 있는 한 무리의 이질적인 존재들이 이 세상에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비록 승려가 되지는 못하지만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이질적인 존재에 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은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애정도 미움도 생겨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는 테르톨리아누스의 언명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

<바다의 정취, 텐보(展望) 1949년 10월호>

A섬은 80채 중 65채가 조직화된 완벽한 촌락공동체로 공산주의의 자연스런 원형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산화의 이면에는 선주 아키야마의 결단이 있었다.

그런데 정치망의 일종인 다이보망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아오던 마을이 최근 시름에 잠겼다. 물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태평한 사람은 아키야마 뿐이었다. 게다가 아키야마 노인은 최근 마을에 시집온 이치코에게 배를 태워주겠다는 약속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여자가 배에 타면 부정 탄다며 반대하지만 정작 이치코가 배이 타고 출항하자 물고기가 그물 한 가득 잡혀 만선이 된다.

유산계급임에도 배를 내놓고 여성을 배에 태우는 등 열린 사고를 갖고 있는 아키야마와 민중임에도 구습에 얽메어 고리타분한 사고에 갇혀 있는 마을사람들을 대비시킨 이야기이다.

<반짝이끼, 신초(新潮) 1954년 3월호>

태평양 전쟁 말기 홋카이도 인근 섬에 27톤급 제5세진(淸神)호가 난파된다. 페킹 갑에 상륙한 이들은 오두막을 발견하여 가까스로 몸을 피하지만 일곱 명의 생존자는 혹한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 사망하기 시작한다.

최후 생존자인 선장은 전쟁 미담으로 칭송받지만 뒤늦은 조사 결과 사망한 시체를 식인한 혐의가 드러난다.

살인은 '문명인'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인육을 먹는 것은 '문명인'의 체면과 연관을 짓게 됩니다.

죽이기는 했지만 인육을 먹진 않은 '살인'과, 이미 죽은 사람을 먹은 '식인' 중 어느쪽이 윤리적으로 더 비난받을 행동인가?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먹지 않겠다는 니시카와와, 살기 위해 먹는 것에 어떤 윤리적인 문제가 있냐고 반문하는 선장의 이야기가 희곡이라는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4390777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