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프속의 여자 - 포켓북 한국소설 베스트
이순원 지음 / 일송포켓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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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68년 겨울, 화자 은수는 강릉에 살았다. 아버지가 한량처럼 밖으로 떠돌았으므로 어머니가 집안 단속을 했다. 그래도 집안에 돈은 좀 있어서 밥 먹고 사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은수 집 일을 도와주는 기숙이네 언니가 시집가기 전날이었다. 가마꾼으로 나선 동네 총각들이 은수 집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그네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화투를 쳐가며 밤을 세웠다. 그러다 트럭 운전 하는 운래가 노은집이라는 처녀를 데려왔다. 운래는 그녀를 구슬러 욕구만 채운 뒤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나머지 사내들도 그녀를 윤간했다. 은수는 이 모든 것을 옆방에서 소리죽여 보게 되었다.

1978년 겨울, 은수는 '특자'로 전방 배치 되었다. 시위에 참여한 탓에 강제징집 당한 것이다.

동계훈련 중 대대장이 시찰을 나왔는데 황중사가 다방 여자를 섭외해 대대장 텐트에 집어 넣어 주었다. 은수는 보르헤르트의 <맑고도 맑은 눈> 때문인지, 아니면 다방여자의 존재가 드러나길 바랐는지, 보초를 서다 공중에 대고 총을 쏘았다.

은수가 오발사고를 일으킨 벌로 헌병대 영창을 다녀오니 '애인이 면회를 왔다 갔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온 '애인'은 어렸을 적 옆집 살던 기숙이었다. 기숙이는 서울에서 시다 살이를 하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아버지 병원비 등을 감당하기 어려워 나이 든 남자의 후처로 일본에 팔려가는 길이었다.

기숙은 어렸을 적 동경했던 은수를 마지막으로 보고 들어가면 일본에서의 삶을 좀 더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88년 겨울, 은수는 은행 사보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권위주의 국가의 검열이 사보에까지 미쳐 일은 재미 없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바야흐로 남한 땅은 감추어져 왔던 성적 쾌락과 부도덕이 공개적으로 허용된 '로코코의 시대'로 접어든 것 같았다.

바로 그 시기에 서른 넷의 기숙이 돌아온다. 남편이 죽고, 꽤 많은 유산을 받은 기숙은 서울에 엠파이어 클럽이라는 술집을 냈는데 개업식 전날 나를 초대한 것이다.

기숙은 담담하게 일본에서의 생활, 아버지 병수발한 일, 동생 사고친 문제 들을 이야기했다. 기숙이는 그러다 어렸을 적 은수가 공장으로 가는 기숙이를 바래다 주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은수는 그때 기숙이에게 공장에 심을 고향 잔디를 떠 주었고, 기숙이는 500원을 나에게 주면서 엄마에게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큰돈이라면 큰돈이었는데 기숙이는 은수가 그 돈으로 책도 사보고 했으면 싶었던 것 같다.

기숙이는 고단한 생활을 견디기 위해 은수를 생각하곤 했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돌려 이야기했다.

1998년 겨울, IMF가 몰아친 남한 땅에서 은수는 전업 작가가 되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숙이는 기숙이대로 시집을 가서 강릉집이라는 식당을 차렸는데 장사가 그럭저럭 잘 되었다.

그 집에서 고교 동창회를 하던 중 아르바이트생이 은수의 명함을 받아가더니 얼마 뒤 작업실로 찾아왔다.

여자애는 노골적으로 성을 팔 눈치를 비췄지만 안될 말이었다. 여자애는 운래형의 딸이었다. 여자애를 혼내고 작업실에 하룻밤을 재운 뒤 돈을 주어 보내려니 그제서야 여자애가 술에 취해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가출한 뒤 주유소에서 일한 일, 주유소에서 남자애들 세 명한테 윤간 당한 일, 그 뒤로 되는 대로 몸을 주면서 돈을 얻어쓴 일 들을.

은수는 1968년 겨울 노은집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떠올린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상처입은 몸을 닦고 방에 들어올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떠나가던 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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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순수>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을 손을 보아 <램프 속의 여자>로 다시 내놓은 작품이다. 작가는 1968년 부터 1998년 까지 10년 단위로,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저녁 눈 속의 외롭고 슬픈 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온 각 시대의 성의 사회사를 탐구하여 시대의 이면을 살펴보고 성 의식 변화를 추적하려는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

노은집, 기숙, 운래의 딸은 모두 비슷비슷한 길을 걷는다. 남자들에게 윤간당하거나, 성을 팔아 아버지와 남동생 뒤치닥거리를 하거나. 그들은 한여름 햇빛 아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한겨울 램프 불빛 속의 희부윰한 존재이다.

그런 여성들을 위로하고 함께하는 것은 은수같은 인텔리겐차가 아니라, '정기옥', '금초' 따위의 글자밖에 쓰지 못하는 우직한 욱태 아저씨거나, 은수가 말을 걸면 부끄러워 자리를 피해주는 현재의 기숙 남편과 같은 사람이다.

이런저런 클리셰의 남발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진지함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역량 덕분에 소설은 몰입도 있게 읽힌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23270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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