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파 남편의 편지
안정효 지음 / 민음사 / 1995년 12월
평점 :
품절


<낭만파 남편의 편지>


평범한 회사원인 주인공 '남편'은 '아내'와 자신이 "훨씬 젊었고, 훨씬 동물적이었고, 밤이 되어 둘이서 경쟁이라도 벌이듯 서둘러 옷을 벗을 때마다 지금보다는 훨씬 신이 났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제는 더 이상 달라질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똑같아졌"고, "정상체위 한 가지만 계속해 온 기간이 3년이었던가 4년이었던가 기억이 나지를 않아"서, 아내에게 사랑의 편지를 써서는 우표까지 붙여 집으로 보낸다. 

다만 남편이라고 밝히는 것은 멋적기도 하고 멋대가리 없다는 생각도 들어서 발신인의 주소와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은 '아내'의 태도가 수상하다. 달뜬 마음을 부쩌지 못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내'에게 '남편'은 아픈 상처를 슬쩍 건드려보는 듯한 심리로 계속 편지를 보내고, 마침내 가상의 '남자'는 '아내'에게 만나자는 얘기까지 꺼내게 된다.


<회귀>


주인공 조덕문은 한국에 있을 때 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시국이 어지러워 조덕문은 어딘가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매일같이 직면했다. 학생들 편을 들자니 위험했고, 그렇다고 행정당국 편을 들면 어용교수 낙인이 찍힐 판이었다. 조덕문은 그런 상황에서 고뇌하다 어느 날, 발작적으로 <대학 교수의 정치적 양심 선언>을 하고야 만다. 행정당국과 운동권 학생들을 다같이 통렬하게 공박한 그 선언은 조덕문의 입지를 옹색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봐라,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도 않고 썩은 권력이 군림하는 거지같은 대한민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갔더니 나는 이렇게 좋은 삶을 살게 되더라> 라고 소리치는 날을 기대하며 조덕문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하지만 미국은 생각과 같이 기회와 평등의 낙원이 아니었다. 대학교수라는 이력은 overqualify 여서 취직에 장애가 되었다. 폭력의 가능성도 주변에 상존했다. 1년쯤 세탁소를 경영하던 조덕문은 <낭비>가 심한 미국인들의 생활방식을 장사 밑천 삼아 고물상을 운영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의 생각이 맞아 떨어져 조덕문은 한 3년간 경제적으로 괜찮은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텍사스에서의 고립감은 참기 어려웠다. 

결국 조덕문은 한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창회를 나가게 되고, 과거 사랑했던 한혜자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한혜자는 덕문이 짝사랑했으나 용기가 없어 끝내 붙잡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녀와 만나지는 못했지만 덕문은 무슨 생각에선지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덕문은 자신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 편의 단편을 엮은 작품집이다. <낭만파 남편의 편지>는 일상을 뒤흔드는 자그마한 사건을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일견 견고해 보이는 우리 일상이 사실은 자그마한 충격과 변화에도 무너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이 유쾌하다. 

<회귀>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동경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비단 지식인 뿐만이 아니고 어느 누구인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동경하지 않으랴. 이곳이 곧 현실이고, 현실이 곧 고통이므로 인간은 '다른 곳'을 동경하기 마련이다. 그 다른 곳을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이곳'을 즉시 '다른 곳'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투쟁가도 있을 것이고, 피안의 그곳을 천국이라는 이름으로 치환하여 아편을 맞는 광신자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불만의 장소이다.


<백합은 이렇게 죽는다>는 소심한 교사가 육성회장 아들을 훈육했다가 각종 협박과 보복에 시달려 끝내 사표를 쓰고 나온 후 "세상이 무섭고 사람들이 두려워 항상 가슴이 두근대는" 상태로 집 안에 숨어 지내는 이야기이다. "군사 독재가 지배한 우리 나라 현실에서 이성과 폭력의 대결에서는 항상 폭력이 이기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역사와 현실도 믿지 못하게 된" 교사는 끝내 세상으로 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켜 '집 안' 이라는 '다른 곳'으로 도피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466139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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