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문화가 재미있다
김지룡 지음 / 명진출판사 / 1998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자율학습 시간이 제일 좋았다. 영한번역본을 펼쳐놓고 소설을 읽고 있으면 선생들도 뭐라 하지 않았고, 이어폰을 소매쪽으로 빼서 턱을 괸 것과 같은 자세로 음악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헤비메탈 씬이 다시금 만개하던 때였고, Hot Music과 같은 잡지도 출간되던 시기라서 상대적으로 알음알음 음악을 듣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음악 씬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 음악이었다. 일본음악은 청계천에서 파는 빽판을 구해 듣거나, 길거리 리어카에서 히트가요를 짬뽕해놓은 테이프로 듣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들었던 빽판이 Loudness의 Thunder In The East였다. 강렬한 빨간색 해가 퍼져나가는 모양의 앨범 표지가 사실은 전범기인 욱일기이고,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되었다. 어쨌든 Like Hell이 준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길거리 테이프에서 나가부찌 쯔요시의 돈보니, C.C.B.의 Lucky Chance니 하는 노래를 들었던 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나중에 그 노래들을 우리나라 가수가 표절해서 부르는 것을 듣게 될 때는 참 착찹한 마음이었다.


어쨌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문화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그렇기에 더 좋아 보였다. 신문에서는 대중문화를 개방하면 우리나라 문화는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민족 혼은 싸그리 말살될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일본문화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현재, 일본문화가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미미하다. 세계적으로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영화와 음악이 통용되고 BTS가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문화 영역이다.


그러고 보면 90년대 중반이 일본 문화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압도하던 일본, 그 일본 젊은이들이 정치로 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개성 넘치는 모습으로 자유를 구가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정도 밥을 먹고 살게 된 이후에야 나타나는 창의적인 모습들과 실험들이 마냥 부러웠던 것은 아니었을지... 


<나는 일본 문화가 재미있다>는 대중문화가 개방되기 직전 일본문화에 대한 단상들을 풀어놓은 책이다. 지금 읽어보면 통찰력 있는 내용도 있고, 전혀 예상과 달리 흘러가버린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이규형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일본 최고' 일변도는 아니다. 나름대로 균형감각을 갖고 기술한 부분이 많다. 특히 전공투 패배 이후 만화와 문학 지형의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은 꽤나 흥미롭기도 하다. 90년대 초중반 일본문화에 관심을 갖고 어둠의 경로로 접해봤던 사람이라면 잠깐 시간을 내어 일독할 만 하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45236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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