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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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집사람이 맘카페에 올라온 글을 보여준다. 새로 산 경차 레이에 경유를 가득 넣고 달렸다는 얘기였다. 남편이 엔진을 내려야 한다며 자신을 타박했는데 어쩌면 좋으냐는 내용으로, 걱정하는 댓글이 다수였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이 불편했다. 레이는 휘발유차이기 때문에 경유를 주유하려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주유를 하려해도 구멍이 맞지 않아 사이가 뜬 상태로 반은 바닥에 흘려가며 주유를 해야 할 텐데 가득 넣고 달렸다고 하니 십중팔구 거짓말이기 쉬웠다. 


소설가가 쓴 산문집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소설가는 무릇 거짓말장이다. '앞으로 내가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해보이겠소!' 라고 선언하고 써내려간 소설은, 읽다보니 진짜 같아서 감동도 하고 재미도 느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가가 '앞으로 내가 참말을 해보이겠소!' 라고 선언하고 산문집을 쓴다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은 해외여행이 활성화 된, 특히 동남아로 나가는 여행객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시기에 작가가 동남아 비행기편에 승선하는 스튜어디스와 스치듯 만나 인연을 맺으며 시작된다. 그때부터 작가는 <젊은 날의 초상>의 영훈처럼, 스튜어디스에게 습작하듯 연서를 보낸다. 마치 나중에 엮어서 책을 내려고 한 것처럼. 


사색의 깊이가 깊지 않다 보니 생활의 냄새가 제거된 다양한 경험을 나열하게 되고 과잉된 자의식을 장식으로 곁들인다. 진짜 작가가 경험한 것인지 소설가의 뻥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는 어느 순간부터 신선함을 잃는다. 


연서는 모두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다. 회를 곁들여 일본주를 마시고, 베토벤과 비틀즈를 듣고, 이름난 고찰을 돌아다니며 꽃놀이를 하고, 때때로 바다낚시에 심취하는가 하면, 제주도든 일본이든 내키는대로 여행을 하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그녀에게' 들려준다. 물론 '미당'에 대한 - 전두환에 대한 헌사를 바친 바로 그 미당 - 헌사도 빠뜨리지 않는다. 

물론 그 이야기들에 역사나 생활의 냄새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그저 관능.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흉내낸 산문집이다. 

책 한권 분량이 되어갈 무렵 여자는 작가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런데 그때 건네는 말이 압권이다. 이 산문집 전체가 '레이의 경유 주유'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열대에서 떠나오면서 비로소 제 몸과 마음이 너무 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더이상 제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느껴지지도 않구요. 너무 그쪽으로 옮겨간 모양입니다."


작가는 이 말을 헤어지자는 말로 이해한 후, 책 한 권 분량도 채웠겠다 쿨하게 이별을 받아 들인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239136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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