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
클라스 후이징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한 때 이덕무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적이 있다. 인쇄술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전, 책 이라는 것 자체가 사치품으로 취급되던 때에 등장할 법한 간서치(看書痴) 이덕무. 스물 네살이 되던 해에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야망을 품었던 바보(痴). 

때로 '책을 읽는 행위'라는 것은 자기만족일 뿐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이득도 없기 때문에 골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독 문자와 관련하여 투입된 시간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로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일컬은 책과 관련된 행위는 대략 아홉 가지가 있으니 독서(讀書), 간서(看書), 장서(藏書), 초서(抄書), 교서(校書), 평서(評書), 저서(著書), 차서(借書), 폭서(曝書) 인데, 이 아홉 가지 행위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도 일어나지 않는 자기만족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자기만족적 행위일 지라도 관람자가 없으면 맥이 빠진다는 것이다. 관람자는 '실존'해도 되고, '가상'이어도 문제 없지만, '없어서는(無) 안된다. 만약 이덕무에게 서재 에 책(書)을 장(藏) 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혹은 책(書)을 쓰지(著) 말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저 아홉 가지 책에 관한 도락은 어느 것 하나 빠져서는 안 되는, 실존하는 혹은 가공하는 관람자를 만족시키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매우 기묘한 행위이다.


1994년된 발표된 <책벌레>는 책 읽기, 또는 책 수집에 미친 요한 게오르크 티니우스라는 18세기 목사가 책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하여 살인을 하는 이야기와, 200년 후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책과 함께 사라진 팔크 라인홀트의 이야기이다.


클라스 후이징은 '영혼을 삼키는 책읽기의 마성적 유혹' 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읽기' 자체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은 슬쩍 비켜간다. 다만 플라톤, 니체, 키에르케고르, 루소,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등 다수의 철학자와 작가들을 무수히 선택적으로, 문장 단위로, 인용할 뿐이다. 90년대 사회과학 책들이 따랐던 유행들처럼.


90년대 사회과학 책을 보면 본문이 반, 주석이 반이었다. 최대한 많은 책들을 인용하는 것이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전인수격으로 권위적인 저작들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변명하려다 보니 원저자의 의도를 주석으로 달아 머쓱함을 감추고자 했다. 

그래서였을까. '마르크스'가, '레닌'이, '트로츠키'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람시'가, '루카치'가, '푸코'가...(무한반복) 의도했던 바가 무엇이었다를 가지고 싸우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책 제목이 아예 'OOO 비판' 'OOO 재반박' 이라고 타이틀을 달고 나온 것도 많았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클라스 후이징이 인용한 저 많은 작가들이 이 책을 더욱 훌륭하게 해 준 점은 거의 없다. 독자를 혼란스럽게 했을 뿐이다. 변죽을 울리고, 인용에 인용을 가하는 따위의 잔기술은 평론가들을 향한 구애는 될 지언정 독자들과의 정면승부는 될 수 없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164515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