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저리 스티븐 킹 걸작선 10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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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셀던은 성적 모험과 환상을 적절히 섞은 '미저리' 시리즈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말콤 로리의 <화산 아래서>나 토머스 하디의 <테스>,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 같은 걸작' 을 자신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미저리' 시리즈를 폭력적으로 결말 짓고 <과속 차량> 이라는 순수문학 작품에 매진해 마침내 완성한다. 

폴은 샴페인에 취해 차를 몰고 자축 여행을 떠나는데, 한적한 시골 도로에서 눈보라를 만나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심한 부상으로 의식불명이 된 폴을 구한 이는 애니 윌킨스라는 거구의 여성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폴의 '넘버 원' 구독자였다.

그런데 한 때 간호사였던 것 같은 애니는 폴에게 이런저런 응급치료를 해주고 약도 주었지만 정작 병원에는 데려가지 않는데... 폴은 차츰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대량 살인에 연루된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사로 잡힌다. 다리가 완전히 부숴져 휠체어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폴은 애니를 위해 죽어버린 미저리를 되살려 내고 새로운 미저리 시리즈를 집필해야만 한다. 


폴은 자신이 애니의 감정 상태와 감정 주기에 좀더 능숙하게 맞춰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애니가 고장 난 시계라도 되는 듯 폴은 애니의 째깍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폴은 살기 위해 애니의 비위를 맞춰가며 소설을 써나간다. 문제는 단순히 비위만 맞추면 되는게 아니고, 그녀의 '코드에 맞게'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미저리를 뚝딱 살려내어 됐지? 라고 물었다간 당장에 도끼가 날아올 판이다.  


충성스러운 독자는 방금 무자비한 편집자로 돌변했다. 

애니가 편집자 행세를 하며, 어쩌면 공동 저자 행세까지 하려고 하며 소설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한바탕 설교를 해 댈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애니는 폴을 자기 맘대로 통제할 수 있는 우월적 위치에 서 있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창의적인 과정은 자기의 통제권 밖에 있는 사항이라고 보았다.

애니는 진정 충성스러운 독자였지만, 충성스러운 독자가 곧 충성스러운 얼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편집자이자 독자인 애니. 그녀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헤라자데가 되어야 한다.


'네가 계속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는 분명한 사실이 있어. 네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너 자신에게까지 세헤라자데 행세를 한다는 사실 말이야'

자신이 음란한 여인이 되어 열정적인 섹스의 환상을 연출하면서 성기를 문지르며 자위를 하듯, 폴은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헤라자데가 되었다... 성기 대신 타자기를 잡는다는 점은다르지만, 두 행위 모두 민첩한 상상력, 재빠른 손놀림, 억눌렸던 욕망을 무리하게 분출하고픈 진심 어린 열정에 의존한다.

 

하지만 폴은 세헤라자데 자신도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의 욕망을 만족시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가와 독자에 관한 흥미진진한 스티븐 킹의 고찰은 '토대와 상부구조'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스티븐 킹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 독자에게는 선택의 폭이 매우 넓다는 것이다. 작가는 폴 셀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폴이 미저리 시리즈를 끝내고 다른 영역으로 자신의 문학적 지평을 넓혀간다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폴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중작가를 찾을 뿐이다.


Metallica가 The Black Album으로도 불리는 <Metallica> 음반을 발매했을 때 팬들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견고하고도 날카로운 디스토션 리프들을 차분히 쌓아올려 감정을 응축시키고 마침내 엄청난 힘으로 폭발시켜 카타르시스에 이르게하는 느낌의 Thrash Metal을 기대했던 독자의 귀에 들려온 것은 어딘지 모르게 낭창한 멜로디였던 것이다. 그러다 <Load>와 <Reload>가 발표됐을 때 메탈리카 팬들은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가래끼가 걷혀버린 보컬음, 멜로딕한 리프들... 그렇다. 팬들은 메탈리카의 Thrash Metal을 좋아했던 것이지 메탈리카의 음악 지평이 어디까지 넓어지는지 관심있게 바라보는 후원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Pearl Jam 과 Radiohead 역시 그렇게 팬들로 부터 멀어졌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실험여행을 떠났고, 평론가로부터 Progressive하다는 수식과 찬사를 받았지만 팬들은 잃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7555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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