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에의 제물 동서 미스터리 북스 160
나카이 히데오 지음, 허문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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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54년 9월 26일, 4,337톤의 도야마루호가 태풍에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1,155명이 희생되었다. 작가는 전쟁과 원폭으로 대량 살상 사건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카이 히데오는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허무에의 제물>을 구상·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완성된 것은 이로부터 10년이나 지난 1964년이니, 실로 엄청난 정력이 쏟아 부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때부터 유메노 큐사쿠의 <도구라 마구라>,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과 함께 <허무에의 제물>을 일본 미스터리계의 3대 기서로 꼽기 시작한다. 또한, 전후 3대 미스터리 걸작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 살인사건>, 그리고 <허무에의 제물>이 자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안티미스터리' 라는 타이틀로 선전되곤 하는데, '안티미스터리'는 일본 미스터리계의 기린아 에도가와 란포의 영향과 작가 자신의 성향이 융합되어 나타난 결과라 볼 수 있다. 

나카이 히데오는 본격 추리물의 거장 에도가와 란포가 생존해 버티고 있는 바에야, 더 이상의 본격추리물을 미스터리계에 추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파적인 성향으로 나아가자니 작가의 뛰어난 지적 능력과 호기심이 방해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미스터리적인 분석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도 결국은 어느 것도 진실에 이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즉 '안티미스터리' 작품 쪽으로 작가가 경도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그리고는 마치 헤겔이 '절대정신으로 나아간 것' 처럼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미스터리 작품은 더 이상 발표하지 않는다.


작품은 1954년 12월 10일, 시모타니 류센지 부근의 게이 바 '아라비크'에서 시작된다. 재즈가수이자 자칭 여탐정인 히사오와 그의 친구 아리오는 히누마 집안의 불길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히누마 집안은 최근 도야마루호 사건으로 네 사람이 사망하는데, 문제는 이 집안에 아주 먼 옛날부터 재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누와 뱀신의 저주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이 히사오의 흥미를 끄는데, 얼마 뒤 이 집안의 또 다른 남자, 고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욕실에서 알몸으로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는데 등에는 붉은 십자가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그 흉터는 매저키스트적인 성향 때문이라고 짐작되었으며, 여기서 고노스 겐지라는 불량배가 고지의 애인이자 용의자가 아닌가 하는 가설이 나온다. 하지만 욕실이 밀실이었고,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고지는 자연사로 처리되어 매장된다. 뒤늦게 히사오는 이 사건이 밀실살인 사건이며 트릭을 밝혀낼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자신의 추리를 펼친다. 그래서 지목된 용의자가 바로 고지의 작은 아버지 도지로이다.


그러나 도지로 역시 가스 스토브를 끄지 않고 잔 사고로 밀실 안에서 사체로 발견되고, 누가 봐도 과실에 의한 사고였기에 유야무야 사건은 덮이고 만다. 그와 함께 도지로 범인설도 슬그머니 수그러든다.


그 사이 벌어진 사건이 100여명의 노인이 불에 타 죽는 <성모동산> 사건. 이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은 바로 히누마 집안의 할머니뻘인 아야조.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사건으로 죽은 사람 시체를 세어보면 한 명이 많다는 것. 누군가가 한 명의 시체를 숨기기 위해 100여명의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는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인물이 고지의 애인이자 불한당으로 여겨졌던 고노스 겐지. 하지만 그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설이 점차 힘을 얻어가는데, 뜻밖에도 고노스 겐지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히누마 집안과 가까운 고기치의 처남으로 실존 인물이었다. 그의 자살은 부모 살해의 누명 때문이었다.  


사망자는 점점 늘어나고, 프랑스에서 히사오의 애인 무레타가 돌아와 추리게임에 참여하면서 사건은 이제 더욱 복잡해 진다.


무레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살인을 미리 예측하여 소설화 한 뒤 범인을 잡겠다는 기이한 발상을 제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추리에 참가한 히사오, 아리오 등은 '장미의 색깔이나 보석, 또는 방의 색깔이 살인에 영향을 미쳤다', '샹송의 노래 가사가 살인을 예고했다', '부동명왕의 위치나 경전에 나온 문장이 살인사건의 열쇠 역할을 할 것이다', '수학공식에 따라 살인이 계획되었다', '사촌 오지가 사실은 원폭에서 살아남아 배후에서 살인을 교사했다' 등등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먼 온갖 추리를 마구잡이로 제시한다.

그 모든 추리가 그럴싸하게 여겨졌던 것은 바로 사건이 일어난 연후에 추리를 꿰어 맞추는, 소위 '뱀 지나간 자리를 설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지가 옆집에 전화를 빌려놓고 트릭을 써서 작은아버지 도지로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머지 사건은 모두 자연사였거나 규명할 수 없는 사건으로 무화(無化)되고 만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10만 분의 1의 우연>에 시운마루 호 사건이 나온다. 시운마루호가 좌초되어 가라앉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침몰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신문에 기고를 하는데 이것이 격렬한 논쟁을 불러온 것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시점에 도움의 손길을 보내지는 못할 망정 특종감으로 여겨 사진을 찍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하는 문제였다.


나카이 히데오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관음의 형태로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당신들은 우리가 도야마루의 유족이라고 해도, 고작 가엾다고 여기는 정도밖에 더 생각하지 않았겠지.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어쩌고 하면서, 히누마 집안의 사건을 기다리면서 가슴 설레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뻔한 거지. 당신들뿐만이 아니야, 육친을 잃은 사람 말고 누가 도야마루의 조난을 자기의 아픔으로 받아들였겠는가... 전부라고는 하지 않지만, 이 1955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무책임한 호기심이 새로 만들어낼 즐거움만은 당신을 몫이 아니겠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그럴싸하게 잔학한 사건이 얼마든지 현실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만은 안전지대에 있으면서, 구경하는 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처참한 광경이라도 좋아서 바라보는 것이 괴물의 정체라고. 나에게는 무서운 허무로밖에 생각되지 않아... 내가 한 짓도 다른 의미로 '허무에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구경하는 사람을 나카이 히데오는 괴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월호에 희생된 아이들 부모에게 '시체팔이' 운운한 그들은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악마는 우리 곁에 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75472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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