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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가나코가 수학여행에 간 사이, 가나코의 가족이 무참히 살해된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두 동생은 범인 쓰즈키 노리오가 휘두른 쇠매에 맞아 절명했다. 그는 살인 후 시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짓이겨 놓은 뒤 피가 흥건히 고인 거실 한가운데 망연히 앉아 있다가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순순히 체포된다.
8년의 시간이 흘러 가나코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상담 치료도 받았고, 남자친구도 사귀었다. 하지만 때때로 덮쳐오는 '4시간'은 가나코가 가족의 죽음을 전해듣고 병원에 찾아가기 까지의 악몽같은 4시간을 그대로 재현했다.
어느 날, 가나코에게 쓰즈키 노리오의 사형 판결 확정 소식이 들려온다. 가나코는 쓰즈키 노리오가 쓴 상신서를 구해 읽는다.
상신서에 따르면 쓰즈키 노리오가 범행을 결심한 이유는 가나코의 아버지 아키바에게 속아 연대보증을 서고, 그 결과 5천만엔이라는 큰 돈을 날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 돈은 아내 치요코의 사망보험금이었다. 쓰즈키 노리오는 아키바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소와 기만 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연대보증을 섰던 사람은 아키바의 장인이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아키바는 집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리숙한 쓰즈키 노리오를 이용했던 것이다.
쓰즈키 노리오는 상신서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대부분 인정했다. 그러나 가나코의 어린 두 동생을 죽인 대목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다.
상신서를 구해 읽으면서 해묵은 상처를 들여다 보던 가나코가 쓰즈키 노리오에게 자신 또래의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가나코는 무언가에 홀리듯 미호라는 이름의 동갑내기에게 접근한다.
처음에는 미호가 자신보다 더한 상처투성이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미호를 알면 알수록, 가나코는 그녀가 자신과 너무도 닮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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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죽어가는 순간을 상상하는 자신. 나만 행복해선 안 된다. 네 사람과 똑같이 망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그저 생물학적으로만 살아 있을 뿐 죽은 자가 아닌가 싶어 섬뜩하기 짝이 없다.
'왜 나만 살아남은 거야. 나도 그때 죽어야 했어'
가나코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물음을 지난 8년 간 반복해왔다. 자신은 살아 있던 게 아니라, 억지로 살려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통 받아가며 살려져 있다'. 쓰즈키의 딸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아버지가 사형으로 죗값을 치르면 자신도 드디어 해방되어 다음 인생에 발을 내딛을 수 있다. 그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쓰즈키의 딸은 괴로워하고 있다.
차라리 교수대에 오르는 아버지를 뒤따라 죽고 싶다. 아버지가 처형된다 해도 계속될 이 고통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 이것이 그녀의 본심은 아닐까.
나와 닮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남편 손을 빌려 자신의 육체를 손상시킴으로써 옥중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다가가'려 하는 미호와, 그런 미호를 바라보며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가나코. '길이와 각도만 다를 뿐, 상처의 깊이는 똑같은' 미호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가나코는 어느 순간, 그녀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를 함께 치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2001년 발표되었고, 제22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을 수상한다. 노자와 히사시는 이로부터 3년 뒤 자살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750375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