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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술의 여자
모리무라 세이이치 지음 / 동하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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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주인공 나카미치 도키코의 기묘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시절의 일인 듯 한데,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닌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밤이 이슥한 산 속 숲에서 모닥불을 둘러싸고 수십 명의 남녀들이 손을 잡고 둥그렇게 원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외워지는 "에코, 에코, 자라와크, 에코, 에코, 자라와크..." 라는 주문. 흰 옷을 입은 사제가 움켜진 긴 칼 끝이 도키코를 향해 있는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실신했던가... 부모님은 그것이 도키코의 착각이거나 꿈이었다고 했다. 도키코는 아버지의 따뜻한 말이 사실일 것이라 믿었다.
부동산 회사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젊은 3인조 오가, 우나하라, 야마기와는 최근 못된 버릇을 들였다.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며 적당한 여자를 물색하여 태운 뒤 한적한 곳으로 끌고가 겁간하는 것이었다. 윤간 당한 여자들은 입을 다물기 마련이었기에 이들의 수법은 점점 대담해져 갔다.
어느 날도 이들 3인조는 두 명의 여성을 유인하여 늪 부근에서 강간을 시도한다. 여자 중 한 명은 이내 체념하여 3인조는 목적을 달성하지만, 다른 한 명의 여성은 처녀라 그런지 '몸이 딱딱하여' 윤간 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들은 여자들을 팽개고 도망친다. 이튿날 그 중 한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고 경찰이 수사를 개시한다.
경찰은 세 남자가 두 여자를 태웠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살해되지 않은 다른 여성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녀는 3인조와 공범이었을까? 아니면 피해자였지만 살해만은 면한 것일까? 만약 그녀가 범인들의 마수를 피했다면 어째서 살인사건의 목격자로 나서지 않는 것일까?
또 다른 여성의 정체는 바로 나카미치 도키코였다. 그녀는 그 사건 이후 전도유망한 젊은이와 결혼하여 행복을 구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갈 수 없었다. 남편이 친구라며 집에 초대한 젊은이가 3인조 중 하나였던 우나하라였던 것이다. 우나하라는 도키코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방문이 거듭될 수록 도키코는 불안해졌다.
얼마 뒤, 도키코 부부는 우나하라의 권유로 유니트 하우스를 구입한다. 그런데 얼마 뒤, 바로 그 유니트 하우스에서 우나하라가 청산가리가 든 위스키를 마신 뒤 사망한 채 발견된다. 유니트 하우스는 밀실이었고 열쇠 중 하나는 죽은 우나하라의 주머니에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열쇠는 도키코가 코인 캐비닛에 보관한 가방 속에 있었는데, 코인 캐비닛에 맡긴 날짜를 따져보면 도키코가 열쇠를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동창회에 다녀왔다는 알리바이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유력한 용의자는 우나하라를 제일 처음 발견한 아리자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리자와는 자신이 도키코의 요청을 받고 유니트 하우스에 왔다며 결백을 주장했는데...둘 중 한 명은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얼마 뒤 아리자와가 도로변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자 형사들이 우나하라의 주변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과거 3인조 사건과의 연관성을 의심한 형사들이 차를 뒤지자 도키코의 지문이 묻은 레코드 바늘이 나온다. 그 사건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녀는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침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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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술의 여자>는 1974년 <소설보석>에 신년호부터 5회에 걸쳐서 연재된 소설로, 연재 당시 제목은 <어둠 속에서 불이 보인다> 였다.
소설에 등장하는 흑마술과 악마숭배 의식은 작품을 모두 읽고 나면 일종의 양념일 뿐이지만 작가의 뛰어난 기교 덕에 분위기 고조에 한 몫을 한다.
도키코가 3인조에게 겁간 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선천적으로 성기가 없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3인조는 그녀가 처녀라 '몸이 딱딱해' 그런 것으로 오인해 그녀를 내버려 두고 다른 여자를 통해 욕정을 채우고 떠나가버린다.
도키코는 나중에야 다른 여자에게 신체의 비밀을 들키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겁간을 당했음에도 정상인 몸이어서 다행이라는 듯 도키코의 불구를 동정했다. 도키코는 그것에 격분하여 여성을 살해하고 이후 인공 성기를 이식받는 수술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된다.
우나하라가 도키코의 집에 거듭 드나들다 그녀를 기억해내고 만다. 도키코는 우나하라를 살해하고 아리자와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하지만, 아리자와가 자신의 약혼녀를 겁간한 복수를 결행했다고 오인한 3인조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사건이 복잡해진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치는 <추리작가의 고뇌> 를 통해 복격파로서의 고민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사회파의 대두에 의해 현대의 독자는 리얼리즘의 세례를 받았다. 제아무리 뛰어난 수수께끼일지라도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면 납득하지 못한다. 또한 독자도 '뛰어난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해명'만 하면 되었던 종래의 추리소설에 대한 소설로서의 깊은 맛, 사회적인 지식과 정보, 멜로드라마적인 요소, 혹은 문학성 등 여러가지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수수께끼 풀이만 가지고는 대다수의 독자가 만족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와 더불어 사회파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면서도 본격파적 요소에 대한 고민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던 모리무라 세이치. 미우라 아야꼬는 그를 '왜곡된 인간상을 고발함과 동시에 인간성의 근원을 파헤치는' 작가로 평가 하였다. 군중에서 소외되어 개인이 느끼는 우울함을 미스터리와 결합시켜 최후에는 인간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모리무라 세이치의 소설은 70년대 고도성장기 일본사회의 이면을 묘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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