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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바덴에서의 여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평점 :
소설은 화자 '나'가 레닌그라드로 출발하는 기차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책은 상당한 장서가인 이모에게서 빌린 것인데, '마음속으로는 이 책을 돌려주지 않을 작정' 이었다. 너무 낡고 거의 해어져서 새로 제본한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예프스카야의 회상록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애칭은 페쟈) 부부는 1867년 4월 중순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빌나를 거쳐 베를린으로 간 뒤 드레스덴에 도착한다. 페쟈는 독일인들이 자신을 속여먹는다고 불평했고, 때때로 불쾌한 일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신혼부부는 자주 화랑에 갔는데, 이때 죽기 전에 선물받게 되는 <시스틴의 마돈나>를 보게 된다.
화랑에서 페쟈는 그 시절, 즉 사회주의 단체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시베리아에서 4년간 유형 생활을 하던 시절, 을 종종 떠올린다. 간수 크리브초프 앞에서 한없이 비굴했었던 그 기억이 그를 괴롭힌다.
밤이 되면 페쟈는 안나에게 가서 '밤 인사'를 했다. 거의 매일밤이었다. '항해'는 순조로울 때도 있었고, 파도에 휩쓸리는 경우도 있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도박꾼>을 쓰던 시절 채용된 속기사였다. 둘은 처음 만나던 순간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을 했다. 하지만 집에는 다 큰 의붓아들이 있었고, 페쟈의 형수도 당연하다는 듯이 생활을 의탁하려 했기 때문에 신혼을 즐길 수 없었다. 그들이 여행을 떠나온 이유였다.
부부는 드레스덴에서 바덴바덴으로 다시 출발한다. 그곳에서 페쟈는 룰렛 게임으로 큰돈을 벌어 빚을 갚을 작정이었다. 바덴바덴에 머물던 초기에는 운이 좀 따랐던 것 같다. 하지만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는 사이 점점 잃는 경우가 많아졌고, 안나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화를 내는 빈도 역시 잦아진다.
경제 사정은 최악이었고, 문단에서도 조롱거리가 되거나 따돌림을 당했다. 문단의 주류는 투르게네프였고, 문단 동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네크라소프는 그를 피했고, <가난한 사람들>의 진가를 인정하여 등단에 도움을 준 벨린스키 마저 떠나갔다. 곤차로프가 <오블로모프>로 장당 400루블을 받고 있을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토록 가난했는데도 기껏 100루블을 받고 글을 써야했다.
그럴수록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에 몰두했고, 사소한 것들을 자신의 운과 연결시켰다. 물론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는 매번 돈을 잃었고, 안나에게 무릎꿇고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으며, 다음 날이 되면 결혼반지나 단벌옷을 저당잡혀 도박장으로 갔다.
그는 마지막 동전 한닢까지 다 잃어서 더 이상 저당잡힐 것이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안나가 독한 맘을 먹고 그를 떠나려 하거나, 그녀 스스로 도박에 뛰어들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격정적으로 용서를 빌거나, 간질발작을 일으키거나 했다. 가끔 그가 푼돈을 땄을 때 사오는 조그만 선물, 포도라든가 자두같은 것들, 그런 것들만이 매우 희미한 색채로 그들의 삶을 채색할 뿐이었다. 신혼여행이라 할 만한 그 여행에서 모든 것을 잃은 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화자 '나'의 여행 역시 종착지에 이른다. '나'는 그가 죽어갔던 집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고, 아내에게 "나는 오늘 죽을 거야, 아냐"라고 말했다. 의사들은 그의 상태가 호전되리라 했지만, 몇차례 폐출혈로 피를 흘린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눈을 감는다. 안나에 따르면 이것은 저녁 8시 38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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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드 치프킨은 1926년 구소련 민스크에서 유대계 러시아인 의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한 그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의사이자 연구자로서 평생을 보낸다. 1950년 스탈린의 반유대정책 때문에 고초를 겪던 그는 1957년에야 모스크바 거주 승인을 받아 터를 잡지만, 아들 내외가 미국으로 떠나자 마찬가지로 1979년과 1981년에 이민 비자를 신청한다. 물론 당국은 그의 비자를 거절하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는 생전에 단 한권의 책도 출판하지 못했다. 정식 출판 뿐만이 아니라 지하 출판과도 인연이 없었고, 회람 등으로도 읽힌 적이 없었다. 1977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980년 완성한 이 작품 역시 사후에 발견되어 출판된 작품이다. 남에게 읽히기 위한 목적이 아닌, 오로지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이었을까!
치프킨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매료되어 그의 마지막 삶을 추적하는 여행을 떠나지만, 이는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유대인 차별과 학살을 피해 평생을 괴로워했던 그가 매료되었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야 말로 유대인을 악으로 보았던 작가가 아닌가!
광기와 도박벽, 뇌전증(간질)과 섹스 중독, 그리고 집요한 자기비하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천재의 불운한 죽음을 추적하는 또다른 불우한 작가 치프킨의 기록은 조용하면서도 차가운 슬픔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