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박완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박완서의 <거저나 마찬가지>는 솔직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때 공장에 위장취업 하여 노동자들을 의식화하는 데 신명을 바쳤던 선배가, 시대가 바뀌니 기득권으로 편입된다. 그 선배가 '나'에게 '거저나 마찬가지'로 집을 빌려주더니, 나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착취하고 급기야 '나'의 존재 가치마저 망각한 채 종 부리듯 한다. '거저 근성'을 고치는 것, 그것이 곧 자존감을 되찾는 출발점이다.


조성기의 <작은 인간>은 두 이야기가 교차한다. 문단의 주류인 남성 소설가와 이제 문단에 발을 디딘 신진 여성 소설가가 불륜관계에 빠져든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의 막간을 '전족' 이야기가 채우고 있는데 사뭇 흥미롭다. 특정 신체 부위에 집착하는 '패티시'와 사상에 족쇄를 채우는 '전족'. 어딘지 닮은 부분이 있다.


이혜경의 <피아간>은 도식적이다. 아버지로부터 가장 혜택을 받았으면서도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큰아들, 그리고 대척점에 놓여있는 새어머니와 여자인 '나'. 브레히트가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통해 제기한 핏줄 문제는 매번 흥미롭다.


이기호의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은 재기발랄하다. 이웅평이 미그기를 몰고 남한으로 내려오자 전쟁이 난 것으로 오인한 주인공이 편집증적인 아버지가 만든 땅굴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흙맛을 본 뒤 매료되어 흙만 먹고 살게 되고, 그 흙맛을 배고픈 소녀에게도 전수한다는 내용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이다. 디자인 회사를 차려서 생계를 잇는데 급급하던 주인공이 우연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라디오를 디자인하는 내용인데 발상도 신선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하다. 시각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에 문학이 전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일까에 대한 진지한 성찰. 작품 중에 재미난 내용이 있어 적어본다.


'예술은 집에 가서 하고 회사에서는 디자인을 해라'... 예술은 일종의 진창과 같아서 한번 발이 빠지게 되면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한참 진창을 허우적거리다보면 나중에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예술인지 자위행위인지도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온몸에 흙탕물이 묻어 있어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예술은 집에 가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집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이현의 <그 남자의 리허설>은 불만족스럽다. 한때 촉망받던 예술가, 그러나 더 뛰어난 천재의 등장. 아내의 외도(혹은 남자의 상상). 우연한 사건으로 인한 몰락. 너무나 도식적이다. 어딘지 모르게 김영하의 단편 <이사>가 연상된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아버지의 부재를 다루는 방식이 특이하다. 김애란의 작품은 초기작밖에 읽어보지 못했는데, 천연덕스러운 부분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최근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구효서의 <소금가마니>, 윤대녕의 <탱자>, 하성란의 <웨하스로 만든 집>도 실려 있는데, <2005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읽었던 터라 건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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