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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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에는 토끼를 사다 기르던 아내가 토끼가 죽자 매우 슬퍼하다 결국 토끼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는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목이 부러져버린 아버지와 정신병에 걸린 아버지의 사촌, 그리고 사막의 이미지가 복잡다단하게 중첩되는 <사막에서>, 아내의 꿈에 등장하면 죽고 만다는 다소 엽기적인 내용의 <하얀 발목>, 춤을 소재로 여러가지 이야기에 변주를 가하는 <작별>, 예지와 직감 능력을 지닌 '나'와 돌을 기가막히게 잘 던지는 K를 다룬 <K>,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뒤 아버지의 폭력을 첫 기억으로 갖고 있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인 <하나, 둘, 셋>,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특허권을 인정 못받는다는 내용의 <물 한 모금>, 늘상 이쪽으로 다니던 양씨가 저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날 살인자가 되고 마는 <이쪽과 저쪽>, 불에 탄 신체 일부를 먹어치우는 소방대원들의 이야기 <불 끄는 자들의 도시>가 실려 있다.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한국어가 필수이수과목이었다. 주로 보따리 강사들이 가르쳤기 때문인지 수업의 충실성과 질은 매우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정규직에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한다면 그게 될 일이겠는가) 어쨌든 이름은 잊었지만, 한국어 강사가 소설에 대해 수업을 진행하다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담배 없이 못 사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담배를 보루째 사다놓고 떨어지지 않게 관심을 기울이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내는 평소에 남편의 말을 잘 지켰지만, 그 날은 어찌된 일인지 다른데 신경이 쓰여 그만 담배를 사다놓지 못했다. 남자는 아내에게 화를 내다가 결국 흡연욕구를 참지못해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횡단보도를 건너 가게까지 남자는 한달음에 뛰어갔다. 담배를 달라는 남자의 말을 귀가 어두운 할머니는 잘 알아듣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자꾸 지체됐다. 겨우 담배는 샀지만, 할머니는 가게 문 닫기 전이라 지폐를 모두 갈무리해버렸다며 거스름돈을 동전으로 주었다. 남자는 투덜대며 가게를 나섰다.

한편, 교대근무를 하기로한 동료가 아파서 12시간을 풀로 뛴 택시기사가 차고지로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손님을 태우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다급하게 택시를 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임산부 같았기에 매정하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택시에 타자 마자 진통이 시작됐고, 기사는 맘이 급했다. 어서 임산부를 병원에 내려주고 쉬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신호를 잘 지키던 그가 그날은 신호위반을 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고, 택시는 횡단보도 중간에 쭈그려 앉아 동전을 줍고 있는 남자를 치고 말았다. 가로등이라도 밝았다면 남자를 볼 수 있었겠지만, 가로등은 하필이면 고장나 있었다. 나중에 목격자들에게서 들은 바로는,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이 떨어져서 줍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인데, 강사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남자가 죽은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남자가 골초가 아니었다면, 아내가 담배를 사다놨더라면, 할머니가 귀가 어둡지 않았다면, 만약 거스름돈을 지폐로 주었다면, 택시기사가 동료와 교대를 해서 주의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임산부가 갑작스레 산통을 느끼지 않았다면, 가로등이 고장나지 않았더라면...


박형서의 작품을 읽고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작가가 '우연' 이라는 질료를 가지고 작업한 소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이런 작업은 그다지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의 실험이 불완전한 토대(공감대) 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다분히 사변적인 이야기들이  흥미를 유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작가가 진정 쓰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학술적인 이유 때문에 쓴 소설 느낌이라고 할까.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이응준의 소설을 읽었는데, 그가 쓴 소설 중에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라는 작품이 있다. 박형서의 작품 <K> 중에 ...이십여 년 동안 쌓아온 추억의 속도로 멀어져갔다. 라는 대목이 나와서 어느 작품이 먼저인지 호기심에 찾아봤다.<K>는 2002년,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는 199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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