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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이론은 없다 - 거꾸로 보는 현대 물리학
마르셀로 글레이서 지음, 조현욱 옮김 / 까치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 대칭 vs 비대칭 -
이 책은 어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마법이나 뱀파이어 같은 존재에 심취하다
결국 '가장 강력한 마법'인 물리학에 입문한 저자가 오랫동안 통일이론을 신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전 우주를 포괄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원리는 존재하기 어렵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결정론적 시각에 입각하여 집필된 <최종 이론의 꿈>이 '대칭의 미학'이라면,
이에 대한 반론의 성격으로 집필된 <최종 이론은 없다>는 '비대칭의 미학'을 다루는 책이라고 볼 수 있지요
세상을 하나의 원칙으로 설명하려는 전일성에 대한 강력한 희구를 가진 이들이 많듯
우리가 누구이고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신학부터 최종 이론을 찾고자 하는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유서 깊습니다.
만물을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없다라는 명제는 학문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논쟁거리듯...
이 책은 '전일성'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하여
시간, 물질, 생명의 비대칭성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존재'에 대한 비대칭성을 언급합니다.
참고로 본문 중 2~4장 내용은 난이도가 상당히 높고 난해하며
그래서 저자는 가독성 높은 1, 5장을 먼저 보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서두에 권해주기도 합니다.
- 인간의 한계 -
인간의 한계라는 측면은 세상을 아우를 수 있는 이론이 과연 존재하는가와는 별도의 문제이겠지만
생각해보면 본인이 현대과학을 다시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고도
정작 자신은 오랜기간 받아들이지 않았던 엄청난 천재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던 것처럼
인간이 제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점은 명확합니다.
가령 '위대한 설계'가 정말 있다하더라도
과연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이를 제대로 이해·인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분명 상당부분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불완전성, 불확정성의 원리)
- 미시, 거시 -
그렇다고 이 책이 과학적 탐구가 별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회의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통일이론에 집착할 필요가 없을 뿐
만물을 움직이는 숱한 원리에 대해 연구해나가는 것의 의의는 충분하므로.
경제든 물리든 사회학이든 미시적-거시적으로 '굳이' 나눠보자면 물리학의 경우
미시적으로는 원자, 전자, 광자를 탐구하면서 물질의 아주 미세한 부분을 찾아나가는 환원주의,
거시적으로는 최근 가장 핫한 화두가 되고 있는 복잡계를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저기 부대끼며 살다보면 거시적인 시야의 중요성을 계속 느끼게 되기 마련이고
추가로 요즘은 단편적인 정보가 넘쳐나다보니 종종 미시적 탐구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빛이 휘고 시공간이 굴절한다'라는 연구가 GPS에 반영되어 있는 것을 비롯
실생활에 활용되고 있는 상당수의 편의시설들은 미시적 탐구로부터 파생된 부산물들입니다.
이제 일반인에게도 영화 <가타카>에 나온 A, C, G, T가 익숙한 개념이 되었고
뱀파이어처럼 영원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줄기세포 관련 광고를 늘 접할 수 있듯...
과학자들의 연구가 어떤 면에선 괴짜들의 단순 장난 정도로 비춰질 여지도 있으나
세상의 모습을 바꾸는 데 있어 그들의 기여도를 간과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되지요.
입자물리학 등 본문의 일부가 일반인에게 꽤나 먼 내용일 순 있어도
뉴턴의 중력에서부터 빅뱅이론, 특수상대성 이론, 일반상대성 이론,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머나먼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 건 절대 아닌 셈입니다.
(책 중반부는 난이도가 높아서 1장 → 5장 → 2~4장 순으로 읽는 편이 나아 보입니다.)
- 물리학과 소설 사이 -
이 책은 읽는내내 물리학과 소설의 오묘한 경계선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방정식>,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어디선가 많이 봤던 것 아닌가요?
영화·드라마에서의 슈퍼 영웅·재벌·일탈 판타지나 무협지·판타지에 늘상 나오는 절대무공·대마법 같이
우리가 마음 속 깊이 희구하는 환상성은 문화컨텐츠 뿐만 아니라 물리학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가령 '초끈이론'은 인간이 열망하는 또 하나의 절대마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ㅎ
문득 완벽한 유피넬적 존재인 엘프와 불완전한 헬카네스적 존재인 인간을 대비시킨
<드래곤 라자>가 오버랩되기도 했고
물리학서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서워해서 늑대인간·뱀파이어 등을 찾아보았다는 본인의 이야기부터
프랑켄슈타인 등 다양한 '비과학적'인 사회현상들을 언급하는 수많은 내용을 보면
이 책은 철학과 우리네 인생을 같이 담고 있는 퓨전 물리학서로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이 세상은 어떤 대원칙에 의거 대칭적으로 굴러가는 것 같지만
살다보면 비대칭성에 의해서도 굴러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초월적 존재 혹은 대원칙에 의거 탄생했든,
우리가 아니지만 결국 우리였던 단순 물질에서 우연히 잉태되었든 간에
지금 이 순간 나라는 존재와 생명의 소중함이 경시되는 건 전혀 아니며 저는 살짝 비대칭성에 기우는 입장인데,
'운칠기삼'이라는 단어가 이를 압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해주지 않나 합니다.
대칭의 미학, 그리고 비대칭의 미학
여러분은 어느 쪽에 좀 더 끌리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