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자유가 필요해 - 낭랑 오십 해직 기자 미친 척 남미로 떠나다
우장균 지음 / 북플래닛(BookPlanet)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을 쉬다보니 여행에 대한 목마름이 더 간절해졌다. 그렇다고 여행을 안가는 것도 아닌데,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진다. 가을, 떠나기 참 좋은 계절. 그리고 책 읽기 참으로 좋은 이 계절, 『남자도 자유가 필요해』를 만났다.

 

 

자유를 말하다 회사에서 잘리고 밀려오는 시간의 파도를 꾸역꾸역 넘다가, 그 막바지에 그들은 배낭여행을 하게 된다. 지금은 복직 기자가 된 그와, 여전히 해직 기자인 그가 함께였던 30일간의 시간은 드라마 제목처럼 함부로 애틋했다.

 

해고당한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속으로 얼마나 많이 저릿한 시간을 보냈을까. 그리고 그는, 아내에게 배낭여행을 다녀와도 되겠냐는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사이의 일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그렇다면… 생각만으로도 참 힘든 시간일 것 같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지는 사이, 혹 그 사이가 부부는 아닐까 생각해보면서.

우리와 다른 외국인의 삶을 그들의 시선을 통해 엿보기도 하고 나 혼자 얼굴도 모르는 그이들을 떠올리며 보내는 가을의 오늘은 깊어지는 햇살처럼 따사로웠다. 

 

 

그들의 여행은 단순한 여행으로 그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의 단순한 에피소드만 나열해놓는 그저그런 여행서와는 전혀 다른 글이었다. 때로는 꿈을 말하고 때로는 가족을 떠올리고 때로는 그 나라의 역사를 말하는 지금껏 내가 봐온 여행서와는 차원이 다른 내용이었다. 그래서 더 손에서 놓기 싫었다.


도난당한 카메라와 아이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그들의 시선이, 사진이 주는 여유와 쉼을 빼앗긴 것 같아서 내내 아쉬웠다. 물론 책 곳곳에 자리한 사진들은 나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게끔 만들었다. 사진 속에 들어가 하룻밤 거닐다 오고픈 충동도 일렁거렸다. 하루에도 여러번 책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 안의 나를 꿈꾸어보았다.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을 사진 속에서는 이루는 것같은, 그런 착각의 시간을 보내며 말이다.

고작해야 서른이 넘었을 뿐인 내가 어찌 중년의 그들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싶다는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두 자리 수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나이는 공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나이에 맞는 생각, 그에 걸맞는 삶을 우리네 부모님은 살아왔으니까. 겉으로 보여지는 부나 명예가 아니라, 자세히 봐야 더 예쁘고 반짝이는 인생에 담긴 진정한 희노애락의 순간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수놓고 있을테니 말이다.

 

 

꿈을 꾸는 일은 심장을 뛰게 한다. 살아있는 기쁨을 준다. 내게는 글을 쓰는 일이 심장을 뛰게 하고, 글을 읽는 일이 살아있는 나를 만끽하게 한다. 쓰고 읽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와 오늘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늘 감사함을 지니고 살아야겠다.


파아란 하늘을 자유롭게 거니는 새들처럼, 복직되지 못한 기자님들께서 부디 복직되는 꿈을 함께 꾸고 싶다. 그들이 옳다 생각되기 때문에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걱정 마, 안 죽어
김명훈 지음 / 베렐레북스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글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늘 쓰기를 동반하곤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내게 쓰기의 행위는 생각을 불러온다.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아니, 대답을 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글 속의 그가 던지는 물음들은 내게 생각의 시간을 던져주었다. 과연 나는 지금까지 목숨 걸고 한 일이 있었을까, 떠올리게 했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나는 한번도 목숨 걸고 한 일이 없었다. 그냥 해야하니까, 혹은 금전적인 이유로 상당히 건조하게 때로는 감정적으로 행했던 일. 그리고 조금, 마음만을 담았을 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언제, 어디서…… 이러한 육하원칙의 죽음을 나열할 수 없는 어느 날의 죽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 찾아올 것이다. 그 날의 나는 나의 생을, 그리고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살아있을 때, 숨 쉬고 있을 때, 하고픈 것을 좀 더 이루기로 하자. 그것이 그의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자, 그것이야말로 나 다운 죽음이다.
 

 

 

 

행복하기 위한 특별한 조건은 없다. 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행복은 시작하지 않을까. 아무리 쇼핑을 한다고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돈이 많다고해서, 좋은 집에 산다고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지. 길가에서 파는 맛있는 떡볶이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행복을 판가름할 수 있는 잣대는 내게 있을테니까.

소소한 질문에 답을 해나가면서 나를 위한 글쓰기를 시작해보았다. 때로는 일기처럼, 때로는 몇 줄의 소박함으로 일상을 대신하면서 글을 읽어나가니, 마지막 장으로 다다르는 시간이 무척 아쉽기도 했다.
 
조금은 부정적인 나를 긍적적인 변화로 이끌어주는 글, 내가 사는 오늘이 긍정에너지로 가득찰 수 있도록 활자들이 나를 응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자리했다. 나를 위한 세뇌문을 읊조리는 것 같았다. 내가 나를 끌고 가는 존재가 되어야겠다.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끌고 가는 존재. 나는 내가 살아가는 것이니까, 누군가 대신하여 나를 살아주는 것이 아니니까. 이해가 안되면 이해가 되게끔,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길 수 있는 나를 마주하고 싶다.

걱정은 걱정인형에게 주어야겠다. 나는 나다운, 나다운 삶을 살아야겠다. 오늘을 즐길 수 있는 나, 포기하지 않고 설령 주저앉게될지라도 두려움에 지지않는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가을을 살아가고 싶다.













**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 있고 싶은 남자 - 말 못 한 상처와 숨겨둔 본심에 관한 심리학
선안남 지음 / 시공사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면서, 그리고 혼자가 아닌 둘이 살아가면서 때때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말한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우리는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일을 쉬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간 몰랐던 남편의 일상을 좀 더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힘 없는 모습으로 퇴근하는 남편. 내가 그런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해야 "무슨 일 있었어?" 정도였다. 좀 더 가까이 있는 내가, 내 옆의 그에게 던진 그 단순한 질문은 우리를 꽤 고요하게 만들곤 했다. 그 후로는 물음보다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물론, 그역시 긴 고요함의 시간이었다.

가끔, 한번씩 고요함의 물꼬를 먼저 트는 남편의 목소리, 그리고 전해지는 그의 하루는 꽤 나를 젖게 했다. 함께 있지 않는 시간, 그에게 있었던 일들은 내 생각보다 꽤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대화란, 그렇게 긴 고요함 끝에 이루어지곤 했다. 남편은 그 긴 고요함을 무던히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일까.

 

 

 

 

선안남 상담심리사의 글은 내 안에 똬리를 튼 비밀의 방으로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성큼 들어와 문을 열고 아무렇지않게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은, 글을 읽는내내 상당 시간을 내 안에서 함께 했다. 나도 잘 모르던 나를 들킨 느낌. 그리고 그런 나를 마주하면서 나는 나를 보고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나 역시, 글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처럼 내 남편에게 잘못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방 안에 탑이 쌓였다. 내가 생각없이 행했던 행동과 말들과 그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꼿꼿하게 나를 바라보는 느낌은 오래 계속되었다.

분명한 것은 '다름'이 아닐까. 나는 나이고, 남편은 남편이다가 아니라 나와 남편은 서로 다르다는 본질. 그래서 같은 상황에 있어도 늘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다름. 같은 생각이 아니어도 그의 생각을 존중해줘야한다는 기본적인 생각들이 탑 아래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나르시시스트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르시시즘의 사회에 뿌리 내리고 살고 있는 또 한명의 나르시시스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무척이나 서툰 나르시시스트이진 않았을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더 서툰 표현속으로 밀어넣는 것 같은 직감적 느낌. 이제는 좀 더 변화가 있고 표현에 능한 나를 이끌어내고 싶다.

에코든, 나르시시스트든 건강한 변화는 꼭 필요한 조건일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해도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래서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나의 오늘, 우리의 내일이 되길 빌어본다.

내 남자의 섬에 한 발 가까워지는 오늘,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고 행복을 말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라 믿는다. '다름'을 인정하는 우리가 되길 바라고 바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믿는 만큼 보이는 세상 한무릎읽기
배정우 지음, 홍자혜 그림, 정영은 옮김 / 크레용하우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여덟살때까지 피아노를 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가 시작될 무렵 피아노 학원에 그만 다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속할 수 없는 꿈을 지금 생각해보면 줄기차게 이어왔던 것 같다. 그래도 참 행복했다. 음악 선생님께서 아침마다 내어주셨던 음악실의 피아노는 그 시절의 나를 꿈꾸게 만들었으니까.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음악은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루이스처럼 피아노를 마주하고 때로는 행복에 때로는 어둠에 마치 혼자 맞서 견디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음악은 늘 나를 위로하는 창이 되어주곤 했다. 그렇기에 어쩌면 나는 무던히도 아침마다 음악실에 갔던 걸지도 모르겠다.


열네살의 소년이 쓴 글은 내 안에 작은 울림이 되어 주었다. 오래 잊고 있었던 소중한 꿈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그렇게 때로는 아이가, 아이의 말이, 그 시선이 어른의 또다른 창이 되어주기도 한다. 열네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종이의 여백에 눈을 돌릴틈도 없을만큼 나는 소년의 글에 꽤 빠져있었던 것 같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꿈이 없다. 희망이 없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학원에 가고, 학원 선생님이 알려준 요점정리를 토대로 시험 공부를 한다. 전년도 기출 시험지를 놓고 문제 풀이를 하고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서는 내내 친구들과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거나, 게임을 한다. 그러곤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잠이 든다.


꿈을 물으면 부모님의 꿈을 대답하는 아이들. 부모님들의 바람 1순위는 대부분 공무원이었다. 엄마가 그러는데요, 아빠가 그러는데요. 공무원이 제일이래요! 그래서 저는 공무원이 되고 싶어요. 꿈이요? 에이, 어차피 이루지도 못하는걸요. 사실은 미술 학원 다니고 싶은데 엄마가 무슨 미술이냐고 그래요. 미술은 돈이 안된다고 그런거 하지 말래요.


작년 이맘때 나의 꿈에 대한 주제로 수업을 하며 나는 가슴이 무척 먹먹했다.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심지어 고등학생도. 꿈을 잃은 아이들 같았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꿈이 없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 아이들은 루이스보다 더 좋은 오늘을 살고 있는데…


책의 제목처럼 믿는 만큼 보이는 세상이라고,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아이들이 믿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시금 언젠가 나의 꿈에 대한 주제로 수업을 하는 그 날에는 아이들의 입에서 선생님 제 꿈은요, 선생님 저는요, 라며 꿈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닌, 이룰 수 있는 꿈이라는 것을 그리고 재능보다는 노력이 더 가치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나이기를 함께 꿈꾸어본다.


중학교 입학을 앞 둔 아이들이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 열네살 소년이 아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글은, 꿈을 잃은 채 방황하는 청소년의 접힌 날개를 스르르 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책, 심연이 내게로 왔다. 매일 아침, 기꺼이 인생의 초보자가 되라는 배철현 선생님의 말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의 4단계가 있어야한다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발견하고, 나를 깨닫고, 나다운 삶을 만들자. 그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성찰의 4단계이다.

글은 1부에서 4부까지 이어진다.
고독의 시간 1부, 관조의 시간 2부, 자각의 시간 3부, 용기의 시간 4부.
깊은 바다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의 책과 생각의 방에 들어갔다. 내 안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유난히 새벽을 좋아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좋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서도 간섭을 받지 않는 시간, 주변의 소음도 줄어드는 시간이기에 집중이 더욱 더 잘되는 새벽의 시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어쩌면 새벽의 시간은 내게 자아성찰을 가져다주는 시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이 떠올랐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내면 세계를 담은 시 <참회록>에서 그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되뇌었다. 시대적 배경에서의 차이는 있으나, 자아 성찰이라는 주제면에서의 접근과 선생님의 글에서 말하는 4단계는 서로 조금씩 닮아있다.

혼자만의 시간은 여러 생각을 가져온다. 이 시간은 고독의 시간이다. 외로움의 시간이 결코 아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 내가 나로서 더욱 더 분명해지는 시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고독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불안해하는 외로움의 상태가 아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서로 다른 의미이다. 하지만 외로움이 고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잖이 있다. 왜일까, 왜 그들은 외로움이 고독을 말한다고 생각할까?

고독의 시간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좋은 시간이 되어준다. 조금은 멀리서 객관화적으로 들여다보는 고독의 시간은 그 무엇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는다. 나는 고독의 시간을 좋아한다. 새벽에 즐기는 그 시간속의 나는 무척 행복하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생각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나만의 유일한 임무를 찾아내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므로, 그 말씀에 따르면 나는 꽤나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일을 하면서는 고독의 시간을 즐기지 못했다. 늘 시간에 쫓기고, 여유가 있을 때에는 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에도 나는 늘 다른 무언가를 행했다. 그렇게 이십대를 보내면서 나는 이십대의 나를 마주하지 못함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다.

일을 쉬면서 바라보는 삽십대의 나는 꽤나 감성적이다. 일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감성이 새벽이면 고독의 시간과 함께 되살아난다. 선생님처럼 글을 쓰기도 하고, 나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해보기도 한다. 다른 이와의 소통으로 몰랐던 나를 알게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때로는 글을 옮기며 보내는 고독의 시간은 자칫 나태해질 수 있는 나를 바로잡아주는 유일한 시간이다.

아버지는 5시면 일어나신다. 여름이면 4시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신다. 논을 돌아보고, 밭을 돌아보며, 하우스를 들여다보신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내게 새벽의 시간이 무척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하셨다. 들판의 푸른 생명들의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아느냐면서 말이다. 아버지의 말소리에는 고요함이 담겨 있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 자연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에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께 새벽이란, 고독의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자연과의 安寧을 말하는 시간이었던거다. 어려서의 나는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고독과 관조. 그 깊은 깨달음을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흔히 시 수업을 하다보면 '관조적'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관조적인 성격의 시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관조적이라는 말 뒤에는 늘 깨달음이란 단어도 함께 따라온다. 고요한 마음은 깨달음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자아성찰의 밑바탕이 되어준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보아도 그러하다.

마음에는 또다른 나가 있다고 한다. 그 마음의 세계에서 또다른 나는 괴물이 되어가기도 한다. 악한 생각을 불러오기도 하며, 마음과는 다른 언행을 불러오기도 한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 그러나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괴물이다. 내가 나를 뛰어 넘을 수 있어야 또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인 셈이다. 용기는 스스로 행해야한다.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자각하고 깨우쳐야하는 숙제인 것이다. 나다움을 찾기 위해 꼭 필요한 용기, 그 용기의 첫걸음을 디디는 순간에야말로 나는 또다른 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 본 포스팅은 북캐스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