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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치 1 - 악당 기지로 출근하는 여자
나탈리 지나 월쇼츠 지음, 진주 K. 가디너 옮김 / 시월이일 / 2022년 4월
평점 :
“히어로가 저를 던졌어요.”
일명 ‘히어로’라는 인물로 인해 평생 지팡이 신세를 지게 됐다. 단지 히어로의 진행방향에 있었다는 이유로 공격당해 다리가 분쇄골절 되고, 직장까지 잃었다. 히어로와 마주 하게 된 경위가 떳떳한 것은 아니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건강과 직업을 잃고, 이제 시간만 남은 주인공 애나는 히어로가 일으킨 피해에 집중하고, 수치화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거지같다고 해도, 그건 우리의 시간이다.
스스로가 정의 심판이며 악의 처단자라고 믿는, 망토 두른 개자식 한 명 때문에
우리의 시간이 송두리째 빼앗겨서는 안 된다.
피해를 수치화해서, 총 피해를 산출해 내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애나의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분쇄골절 된 사건 이후에 보여준 히어로 쪽의 행동이 분노를 유발 할 만큼 충격적이고 불쾌했지만, 그래도 인과응보라는 생각을 지울 순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히어로’라는 단어는 절대 선이었고, 애나의 행각은 관심을 바라는 어린아이의 아집처럼 느껴졌다. 책 속에서도 애나가 산출하고 평가한 자료인 ‘부상 보고서’를 비난 한다. 그러나 애나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자료들이 모여 들며, ‘히어로’가 절대 선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대부분의 히어로가 세상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 <헨치>에서 히어로는 대체 무엇이고, 빌런은 무엇인가? 애나를 응원하는 게 옳은가?를 매 번 생각하며 읽느라 머리가 시끄러웠다. ‘히어로’가 절대 선에서 발을 빼는 순간부터 ‘빌런’을 응원했는데, 잘 나가다가도 뒤통수를 쳐서 내가 그린 응원의 경계를 몇 번이고 지우고, 새로 그려야 했다. 전통적인 히어로와 빌런 역할에 충실했다가, 탈피했다가, 충실했다가, 탈피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려내며, 작가가 묻는다. 이래도 응원할거야?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나의 내면과는 반대로, 소설 분위기는 사무적인 일을 하는 주인공 애나를 따라 잔잔하고 소소하다. 애나의 심리 또한 커피한잔의 여유를 만끽하는 직장인의 오후 같다. 이런 인물이 만들어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사건은 또 기상천외해서 눈을 땔 수 없었다. 잔잔하게 돌은 자 같다. 겉바속촉의 매력이 톡톡하다. 기발한 사건 전개에 감탄하면서도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에 옹호해야 할까, 반발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했다.
헨치 일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고,
이 직업을 선택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이 책의 주인공은 히어로도 아니고, 빌런도 아니다. 헨치 ‘애나’다. 그러나 히어로와 빌런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접한 탓에 애나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힘들었다. 많은 사건을 겪은 후에야 애나가 왜 주인공인가를 알 수 있었고, 그제야 히어로와 빌런 사이에서 추구하는 애나의 목표를 진정으로 응원할 수 있었다. 온전히 응원할 마음을 한 가득 안았는데, 이야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참으로 얄미운 작가다. 이제 마음 좀 쏟으려니 더 이상 남은 이야기가 없단다.
“어쩌다가 검은 망토를 두르게 됐어요?”
작가의 의도가 명확한 이야기이다. ‘히어로’와 ‘빌런’이라는 글자에 박힌 기존의 사고를 파괴하라는 것이 다분히 느껴진다. 그게 끝나자마자 이야기를 끝마쳐서 더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좋았다. 영화 <슈퍼배드>, <메가마인드>, 도서 디즈니의 악당들 시리즈 같은 이야기를 예상했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간 신선한 작품이다. 분쇄골절 사고를 당한 직후부터 애나의 위치는 정해져있었다. 애나가 선해지거나 악해지지 않는다. 그녀가 서있는 자리의 바닥 색이 바뀔 뿐이다. 그것으로 애나의 선과 악을 판단해야 했다. 히어로가 선하지 않은 만큼 애나는 선하게 느껴졌고, 빌런이 악한 만큼 애나는 악해졌다. 이런 선악판단은 처음이라 속이 시끄러웠다보다. 괴랄한 가치판단에 겨우 적응했는데, 이야기를 끝내 야속하기만 하다. 악당을 무찌르는 전통적인 히어로물도 질리고, 사연있는 빌런물도 질린 이에게 새로운 장르지 않을까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